- 수리 명목 부품 '뺐다 넣기'

- 내부공모 통해 손쉽게 가능

- 공장도 없이 지정업체 선정

- 사용 못하는 불량도 수두룩

- 지역 제한 악용한 유령회사

- 한수원, 미리 알고도 눈감아

- 가짜 성적서는 눈치도 못채

검찰 수사를 통해 밝혀진 (주)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의 부품 납품 비리 사건은 국내 원전 직원의 도덕적 해이와 관리부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한수원은 관리·감독하는 직원들이 부품을 빼돌려 자기 주머니를 채우거나 시험성적서를 위조해 부품을 들여오는데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검찰 관계자는 "국민의 혈세로 국민의 생명을 위기에 빠뜨린 것"이라고 지적했다.

■빼돌린 제품, 재납품 무사통과

검찰에 따르면 한수원 고리원전 기계팀 담당 과장 신모(46·구속) 씨가 부품 국산화 업체 A사 대표 이모(여·60) 씨와 짜고 저압터빈밸브(수증기 유입 조절) 부품세트를 빼돌리기 시작한 것은 2006년 12월. 한수원은 당시 20년간 사용해 노후화된 부품을 국산화에 성공한 국내업체로부터 납품받기로 했다. 내부규정상 물품 반출 시 반출목록에 기재해야 하지만 이들이 부품을 빼돌리는 데는 아무런 장애물이 없었다. 신 씨는 수리 등의 명목으로 이 씨가 납품한 저압터빈밸브 12대를 빼돌린 뒤 9대를 다시 납품했다. 12대가 21대로 둔갑했고, 그 차액은 신 씨와 이 씨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신 씨는 또 D사 대표 황모(55·구속) 씨와 공모해 2008년 12월부터 2010년 5월까지 고리원전 3, 4호기에 납품했던 재킹 오일 펌프(터빈에 오일 공급) 5대도 수리 명목 등으로 빼돌렸다. 게다가 황 씨는 빼돌린 5대를 그대로 재납품했고 수리를 위해 추가 반출한 13대 가운데 11대는 아예 수리도 하지 않고 재납품한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D사가 납품한 재킹 오일 펌프는 모두 문제가 있어 아예 사용을 못 한다고 검찰은 밝혔다.

검찰 조사 결과 A사는 2006년 한수원의 국산화 부품업체로 지정됐지만 실제로는 자체 공장이 없어 부품을 만들 능력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A사는 원전에 납품하는 모든 제품을 국내 중견기업인 P사 등에 하청을 주는 방식으로 제품을 만들어 납품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 때문에 발전소에는 20년 이상된 노후 부품이 상당수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유령 사무실·시험성적서 위조

검찰에 따르면 한수원은 G사가 지역제한 규정을 피하려고 고리원전 근처에 유령 회사를 차려 놓고 입찰에 참여한 사실을 사전에 인지했다. 온라인 입찰에 참여한 업체의 IP(정보 제공자) 중 상당수가 중복된 사실을 알았지만 협조 공문만 보내고 별다른 제재 조치를 하지 않은 것으로 검찰 조사에서 드러났다. 이 업체는 1989년 제정된 발전소 주변지역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라 원전지역에 주사무소를 두고 있는 업체에 한해 입찰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한 규정을 악용했고, 한수원은 알면서도 눈을 감아버린 것이다.

검찰은 또 원자로의 안전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부품들의 시험성적서가 위조됐다는 것은 더욱 심각하다고 밝혔다. 검찰에 따르면 이 업체는 Q(안전성) 등급과 A(안전영향성) 등급 부품을 사용해야 하는 원자로 냉각제 펌프의 임펠러나 순환수 펌프 등의 시험성적서를 위조해 정상적인 것처럼 제출한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 조사 결과 이들은 생산 비용을 아끼기 위해 값싼 자재를 부품 제작에 상당수 사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원전 비리 뒤엔 허술한 시스템이

이 같은 납품 비리를 개인의 도덕적 해이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그만큼 한수원의 시스템이 허술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한수원은 부품 구매와 관리 시스템을 대폭 개선해 비리 근절에 나섰다.

한수원은 우선 각 발전소 장기근무자의 순환보직을 정례화하고 모든 부품에 무선인식전자태그(RFID)를 부착, 부품이 폐기될 때까지 추적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또 성능검사 등에 인수검사전문가 풀 제도를 도입해 전문가가 기술·품질을 검사하도록 했다. 부품 발주 담당자와 업자 간 유착을 막기 위해 그동안 각 발전소 담당자가 발주하던 것을 본사 통합구매부서에서 일괄적으로 구매하도록 했다. 원전 안전성에 치명적인 위험을 줄 수 있는 시험성적서 위조를 막기 위해 각 발전소가 직접 시험기관으로부터 시험성적서 원본을 제출받아 진위여부를 확인하도록 했다. 한수원 관계자는 "이번 사건은 모두 비리 대책 시스템이 도입되기 전에 발생한 일"이라며 "비리 차단 시스템을 갖춘 만큼 앞으로 이런 비리가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