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뚝뚝함 속에 스민 정감 빛 발하며
- 드라마 속 사투리 쓰는 배역 다양화
- 지난해엔 인기드라마 속 주연 꿰차

- 왜관·일제시대·한국전쟁 거치면서
- 혼합성에 해양적 기질까지 반영
- 적극적이면서 친근감 느껴지지만
- 무례하고 불쾌하게 들릴 수도

- 여러 의미 함축된 독특한 어법
- 야구응원 만나 문화콘텐츠 승화
- 원석 다듬어 활용할 방안 찾을 때

바람은 생각보다 빨리 밀어닥쳤다. 이건 큰 바람이다! 조타실에서 갑판일을 감독하던 선장은 긴장했다. 파도까지 출렁대기 시작했다. 그때 선장은 봤다. 갑판에서 일하던 풋내기 선원이 갑자기 로프를 놓치고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것을. 위험상황. 1초라도 늦으면 선원은 부상 또는 실종이다. 선장이 급히 마이크를 쥐고 소리쳤다.

"(야, 임)마! (줄을) 땡기라!"

현역 꽁치잡이 원양어선 선장인 부산의 이윤길(53) 시인이 들려준 체험담이다. "급하니까. 바람소리 파도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도 않고. 이해시킬 시간도 없고. 소리부터 지르는 거죠." 이 선장은 "마! 또는 땡기라! 같이 짧게 끊어치는 말투 속에 '조심해라' '왜 그러냐' '다시는 그러지 마라' 등등 다양한 신호가 압축돼 들어가 있다"고 말했다.

이런 원리가 항구와 선상을 벗어나 야구장으로 건너가자 부산은 뜻밖에 새로운 문화콘텐츠를 하나 갖게 됐다. 사직구장의 프로야구경기에서 견제구를 던지려는 상대 팀 투수에게 부산 관중은 밑도 끝도 없이 "마!"라고 외친다. 이 "마!"가 "야, 임마!"의 마인지, "하지마!"의 마인지, "야, 임마! 하지마!"의 마인지 아직도 정리가 안 됐지만 지독한 축약형이며 부산만의 어법인 건 분명하다.

1000만 관객 영화 '해운대'나 김주혁 김선아 주연의 야구영화 '투혼' 등에 "마!"라는 구호는 시시때때 등장하더니 TV드라마와 다른 영상물로도 번져 어느새 부산을 보여주는 작은 문화콘텐츠가 됐다. "그 야구공을 아이에게 줘라"는 뜻이지만 다른 지역 사람들에겐 '외계어'처럼 들린다는 사직구장 관용표현 "아주라!"와 함께.

부산말의 형성과정에서 다른 여러 요인과 함께 바닷가 도시라는 입지와 해양성이란 특성도 한몫했을 것이란 믿음은 학술적 근거도 있다.

언어학자 이근열 박사와 부산대 김인택(언어정보학과) 교수는 2011년 논문 '부산 방언의 문화 콘텐츠론'에서 "부산은 경상도 지역에서도 변방에 속해 있으며, 바다를 접하고 있는 항구도시이다. 항구도시는 어업에 종사하는 인구의 비율이 높고, 대륙과 해양의 통로라는 점에서 주변 언어의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가능성은 확인했다

부산스타일을 찾아내고 가꾸는 일은 '부산사투리의 재발견' 노력과 떼려야 뗄 수가 없다. 그 가능성을 제법 맛볼 수 있었던 원년은 지난해였다. KBS '해운대 연인들', MBC '골든타임', tvN '응답하라 1997' 등 주요 방송사에서 부산이라는 공간 자체를 배경으로 삼고, 비중 있는 출연진이 거의 부산사투리로 연기하는 콘텐츠를 쏟아냈기 때문이다. 그간 조폭이나 코믹 등 양념과 보조에 치우쳤던 부산사투리는 이 과정에서 전국적 관심의 대상이 됐다.

"내 니 좋아하잖아. 억수로 좋아하거든.…내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하면 좋겠노? 어떻게 하냐고? 가시나야!"('응답하라 1997' 중 윤제의 대사) 드라마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이루는 사랑고백이 부산 억양의 "가시나야!"로 끝나는데 그 묘미가 전국 시청자들에게 먹혔다. 부산사투리와 부산스타일은 따로 놀지 않는 것이다.

배우 고인범(54) 씨는 현재 부산연극협회장이며 지난 2005년 KBS 드라마 '황금사과'를 시작으로 '해운대 연인들'과 최근 막을 내린 MBC 드라마'메이 퀸' 등 드라마 20여 편에 출연해 부산사투리 연기로 입지를 다졌다. 고 씨는 "2012년의 TV드라마를 돌이켜 보면 편당 출연자 1명 이상은 부산이나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캐릭터였던 것 같다"며 "현장에서 겪어보면 부산사투리가 특유의 정감을 발휘하면서 그 자리가 넓어지는 상황"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재래시장의 표현 살펴보니

부산대 김인택 교수는 2004년 논문 '부산의 언어문화'에서 "부산지역어는 낙동강으로 인해 서부경남권과도 다르며 조선시대부터 발달한 시장으로 인한 상업적 성격, 왜관·일제시대·한국전쟁에 따른 혼합성, 바다를 낀 해양성의 영향을 받았다"고 정리했다.

부산의 재래시장은 이런 여러 특징이 여전히 함께 작용하는 현장이다. 손님과 상인의 호객언어는 "고마 이리 온나, 온나 잘해 주께, 일로 오소, 마이 주께, 무보소, 아지매 머주꼬" 등이 지금도 쓰인다. 적극적이면서도 정감이 있지만 다른 지역 사람들이 접하면 초면인 사람들끼리 쓰기 어려운 무례한 반말로도 인식된다.

흥정언어는 좀 더 강하다. "할끼요 말끼요, 그래는 안 된다. 딴 데 가서 알아보소, 마 가가소, 아따 디게 따지네, 그냥 가져가라 마이 주는 기다"(김인택 교수팀이 부산의 재래시장을 직접 조사해 수집한 표현들) 등이다.

흥미로운 점이 있다. 부산사투리는 익숙한 사람에게는 친근하고 속정이 깊다는 느낌을 주는 데 반해, 그 특징을 잘 모르는 외지인들에게는 무례하고 무뚝뚝하고 불쾌하게 받아들여질 확률이 높다는 것이 연구자들이 대체로 합의하는 특징이다. 그런 특징을 시장의 흥정언어와 호객표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 LG트윈스의 외국인 투수 오카모토 신야는 한국을 떠나며 가진 인터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사직야구장의 '마!'라는 함성이었다"고 말하며 혀를 내둘렀다. 오카모토뿐 아니라 다른 외국인 투수들도 비슷한 소감을 적잖게 표현했다. 한마디로 "마!"라는 구호는 사직구장에서만 접할 수 있는 열정적이고 흥미로운 문화였지만,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불편하고 힘들었다는 하소연이기도하다. 여기에도 부산사투리의 특징은 드러난다.

부산사투리는 부산을 바깥에 널리 알리고 부산시민에게 자긍심을 줄 수 있는 '부산스타일'의 핵심요소임에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그걸 보살피고 다듬어 제대로 내놓는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는 점이다. 2013년이 밝았다. "됐나? 됐다!"


# "부산사투리만의 묘미, 방송가서 좋아하더라꼬"

- 안방극장서 맹활약 고인범 부산연극협회장

"지난해 초 TV조선의 18부작 드라마 '한반도'에 단역 합참의장 역할로 출연해 그때 부산사투리 억양으로 '공격합시다' 하고 짧게 대사를 끊어치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 장면을 MBC 드라마 '메이퀸'의 백호민 연출자가 봤답니다. 그래서 '메이퀸'에서 강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강대평 회장 역할을 맡았죠."

배우 고인범(54·부산연극협회장·사진) 씨는 1980년대 초부터 부산에서 연극을 하고 있는 베테랑이다. 부산에서 연극연기로 잔뼈가 굵은 그의 부산사투리는 걸쭉하다. 지난 2000년부터 지역방송 KNN의 프로그램 '쇼 유랑극단'의 진행자와 출연자로서 지금껏 독한 사투리로 부산 경남 시청자들을 들었다 놨다하고 있는 이가 바로 고 씨다.

고 씨는 "2005년 KBS 드라마 '황금사과'에 부산말 쓰는 형사 역으로 나선 게 첫 방송연기였는데 지금까지 '대조영' '대왕세종' '각시탈' 같은 드라마에서 굳이 사투리를 강조하지 않는 배역도 맡았지만, 방송 관계자들은 여전히 내게서 부산말의 묘미를 기대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연출가나 다른 지역 연기자들이 부산말 특유의 짧음, 함축, 정감 같은 것을 좋아한다. 아주 복잡한 상황도 '니 와 이라노' 한마디면 정리해버릴 수 있는 매력이 있다면서 내가 부산말 한마디 하면 다 따라 한다"고 웃으며 말했다. 부산사투리를 발판으로 삼은 그는 최근 연기지평을 더욱 넓혀가고 있다.

고 씨는 "더 열심히 활동해서 그 성과를 바탕으로 부산연극의 발전에도 힘을 보태고 싶다"며 현직 부산연극협회장으로서 애정과 포부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