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9년 부마항쟁, 1987년 6월항쟁 등 시민들 선봉에 서서 독재정권 무너뜨려
- 민주화 헌신했음에도 민주정권 열리면서 쇠락의 길 접어들며 항쟁의 기억 망각
- 정체성도 흐릿해져
야도(野都) 부산. 부산은 불의에 저항하는, 야성이 강한 도시다. 1979년 10월 부마항쟁, 1987년 6월항쟁처럼 한국 근현대사의 고비 때마다 부산 시민들은 일어나 역사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했다.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열었다.
■언제나 민주화의 선봉에
6월만 되면 어김없이 나오는 사진이 있다. 1987년 6월 26일 경찰이 시위대를 저지하자 대형 태극기를 든 시민 두 명 사이로 한 청년이 웃통을 벗어젖힌 채 경찰 쪽으로 달려나가는 장면이다. 6월항쟁을 상징하는 이 사진이 찍힌 장소는 서울이 아니라 부산의 문현로터리라는 사실을 아는 부산 시민은 별로 없다. 당시 한국일보 고명진 사진기자가 찍은 '아! 나의 조국'이라는 제목의 이 사진은 1999년 AP통신의 '금세기 100대 사진'으로 뽑혔다. 이 사진은 부산지역 6월항쟁자료발간위원회에서 펴낸 '6월항쟁-사진자료집'과 고명진이 쓴 '다시 쓰는 그날 그 거리'에 실려 있다.
부산은 1987년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박종철 열사의 고향으로, 어느 지역보다도 열기가 뜨거웠다. 6·10 국민대회 이후 다른 지역에서는 소강상태에 빠져있던 항쟁의 불길을 되살린 곳이 바로 부산이었다. 특히 6월 18일 부산에서의 시위는 6월항쟁을 전세계 언론의 주요기사로 만들었다. 치안당국이 '경찰력의 한계가 왔다'고 보고하게 하고, 전두환 정권이 계엄 선포와 군사 진압을 놓고 고민하게 만듦으로써 결국 6·29 선언을 이끌어낸 분수령이었다.
그러나 6월항쟁에서 부산의 중요성과 의미는 제대로 기억되지 않고 있다. 전국적으로 있었던 시위가 부산에도 있었다는 정도로만 기억될 뿐이다.
■잊혀진 항쟁
민주당 조경태(부산 사하을) 의원은 지난해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및 관련자 명예회복과 예우에 관한 특별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이 법안은 한나라당 이주영(경남 마산갑) 의원이 2010년 12월 대표 발의한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과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특별법안'이 부실하다고 보고 부산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조 의원을 통해 낸 제2법안이다. 33년 전 사건에 대한 법안이 이제야 발의될 정도로 부마항쟁은 철저히 '잊혀진 항쟁'이다.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유신체제에 항거한 민주화운동이다. 10월 16일 부산대생 4000여 명이 교내에서 '유신 철폐'와 '독재 타도'를 외치면서 시작돼 10월 20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피살되면서 마무리됐다. 부마항쟁은 그동안 광주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항쟁에 가려 부산 사람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있다.
■쓸쓸한 기념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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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대 부마항쟁발원지 표지석. 김동하 기자 kimdh@kookje.co.kr |
부산에서 현재 부마항쟁을 기억하는 기념물은 부마항쟁이 시작됐던 금정구 장전동 부산대학교 교정 안에서만 볼 수 있다. 부산대에 있는 부마항쟁 기념물은 세 가지. 10·16 부마항쟁탑과 부마항쟁발원지 표지석 그리고 10·16 기념관이다.
10·16 부마항쟁탑이 군부독재가 종식된 다음 해인 1988년 학생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제2도서관 앞에 건립됐다. 그러나 입구가 아니라 도서관을 돌아가는 뜰 가운데 서 있어 오가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실제로 부마항쟁이 시작됐던 옛 도서관 앞에는 1999년에 세워진 부마항쟁발원지 표지석이 서 있다. 지금은 도서관이 철거되고 건설관이 들어서 있다. 부마항쟁발원지 표지석의 오른쪽 뒤편에는 10·16 기념관이 있다. 원래 명칭은 효원회관이었으나 대학본부가 2005년 건물의 개축과 함께 10·16 기념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기념물 주위는 썰렁하다. 단지 표지석이나 탑만 달랑 서 있을 뿐이다. 10·16 기념관도 마찬가지다. 명칭만 바뀌었을 뿐 건물 안에는 그 날을 기억하는 전시물도 하나 걸려 있지 않다. 부산대 캠퍼스 지도에도 이런 기념물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학교 밖을 나서면 더욱 심각하다. 부산 민주공원에서나 그 기억을 찾을 수 있을 뿐 부산시내 어느 곳에서도 이를 기념하는 조형물이나 장소는 없다. 부산에 이어 시위가 일어났던 마산에는 첫 시위 장소인 경남대 교정과 청소년공원에 부마항쟁 기념 조형물이 조성돼 있다.
■민주화의 아이러니?
민주화에 앞장섰던 부산이 스스로 그 기억을 망각해버린 까닭은 무엇일까. 일차적으로는 부산의 정치를 대표했던 인물인 김영삼 전 대통령이 삼당합당을 하면서 민주세력의 정체성이 희석된 점을 지적하곤 한다. 박재환 부산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문민정부 이후 그의 인기와 영향력이 부산지역에서 소멸해 버렸음에도 여전히 보수적인 정치 경향을 보이는 것을 보면 이것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오히려 민주화에 헌신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정권의 시대가 열리면서 쇠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역사의 아이러니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자기 이익을 잘 챙기지 않는 부산 사람들의 기질도 한몫한 것으로 풀이된다. 부산이 민주화에 앞장섰다고 해서 그 업적을 자랑하거나 이득을 챙기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기질과 맞물려 부산은 민주화의 논공행상에서 소외되고, 스스로 기억을 지워버린 것은 아닐까.
# 4·19 희생자 위령탑 접근성 저하, 답답한 부산시 민주화기념물 관리
지금은 부산 중구 민주공원에서 만날 수 있는 4·19혁명희생자 위령탑은 원래 용두산공원에 있었다. 4·19혁명 다음 해인 1961년 4·19혁명과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국제신문 주도로 부산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건립됐다. 용두산공원을 찾는 부산 시민과 국내외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이 위령탑이 2007년 민주화의 성지인 민주공원으로 이전하면서 시너지 효과에 비해 접근성이 떨어졌다는 지적이 높다. 다른 민주화 기념물이 대학이나 민주공원 같은 특정 장소에서만 접할 수 있는데 비해 부산 시내의 일상적 공간에서 그나마 접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기념물이 사라진 데 대해 아쉬움이 크기 때문이다.
기념물을 관리하는 부산시 정책에 대한 아쉬움은 이뿐만 아니다. 부산시는 2009년 9월 의견수렴 절차 없이 시내버스 노선도와 도로표지판의 민주공원이라는 명칭을 중앙공원으로 변경했다. 시는 지난해 서구 부민동 임시수도 기념관 명칭을 이승만 기념관으로 바꾸려다가 지역 민주화운동단체가 반발하자 철회했다.
# 양산 솥발산 공원묘원 내 '열사묘역', 부울경 노동운동가 등 40여명 안장
경남 양산의 솥발산 공원묘원에는 '솥발산 열사묘역(사진)'이 있다. 전태일 열사, 문익환 목사, 김근태 의원이 잠든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과 광주 망월동 5·18 묘역과 함께 가장 큰 규모의 민주화 관련 묘역이다. 솥발산 공원묘원은 부산 울산 경남 지역의 민주열사들이 모셔져 있는데 노동운동가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부산은 일찍부터 노동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부산은 일제에 의해 다른 지역보다 먼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조선방직 여공을 비롯해 근대적 노동층이 일찍 형성됐다. 따라서 파업과 같은 노동쟁의는 자연스럽게 항일운동의 성격을 띠었다. 해방 이후에도 부산을 중심으로 한 동남권은 산업화가 빠르게 이루어져 노동운동이 어느 지역보다 활발했고 희생자도 많았다. 양산에 있는 솥발산 공원묘원에는 1991년 의문사한 한진중공업 박창수 열사를 시작으로 민주화·노동운동가 묘소가 들어서기 시작해 현재는 40여 기에 이른다. 이일래 부산대 사회학 박사
공동취재= 이일래 부산대 사회학 박사
공동기획= 국제신문·대안사회를 위한 일상생활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