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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일 중국, 러시아, 영어 간판이 뒤섞여 있는 부산 동구 초량동 외국인상가. 부산은 조선시대 왜관이 생긴 이후 동아시아 교역과 교류의 네트워크도시로 자리매김해왔다. 박수현 기자 parksh@kookje.co.kr |
- 축구장 210개 맞먹는 부산진 일대 150만㎡, 100년 전 일제가 매립
- 한·중·일 일꾼들 몰려 국제인력시장 형성
- 부산 앞바다 통해 일본부터 러시아까지 각국 문화 흘러들어 이국적인 풍경 혼재
- 글로벌한 공간 변모
부산 중구 중앙동과 남포동 거리가 100년 전에는 바다였다는 사실을 아는 부산 시민은 그리 많지 않다. 1892년 부산매축주식회사라는 일본회사가 설립돼 영선산(영주동과 중앙동 사이), 용미산(옛 부산시청)을 깎아 바다를 메웠다. 매립 공사판에는 한·중·일 일꾼이 대거 몰려 국제인력시장이 형성됐다. '노가다'라는 말은 이때 흔히 쓰인 '도가다(막벌이 일꾼을 뜻하는 일본말·土方)'에서 유래됐다. 부산은 이미 100년 전부터 국제도시의 기틀을 닦았다.
■바다 메워 닦은 세계화 디딤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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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경찰서 내 부산진매축기념비. |
부산 동부경찰서에는 음주운전 금지 현수막과 울타리에 가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비석이 있다. 바로 '부산진매축기념비'다. 1939년 부산진 일대 3차 매립사업을 마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일본인 사업자가 세운 것이다. 당시 일본은 부산의 대륙 관문으로서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해 항구 주변에 엄청난 매축지를 조성했다. 150만 ㎡의 규모로 축구장 210여 개와 맞먹는다. 부산시가 1983년 동구 고관 입구에 세운 '부산진지역매축지비'에는 매축의 정보가 들어있다. '구관(고관), 부산진, 범일동, 문현동, 적기에 이르는 해안을 모두 메웠다'고 적혀 있다.
세계와 만날 수 있는 바다를 낀 부산에는 일찌감치 국제 관문의 인프라가 구축되고 있었다. 그 가능성은 부산의 지도를 바꿔놓았다. '빨간 쇠상자들이 있는 곳', 컨테이너의 이미지로 보이는 부산항. 매립된 새 땅 위에 국제도시의 역사를 써가기 시작했다.
■왜관·청관·텍사스촌·러시아상가 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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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치된지 100년이 넘은 부산세관의 수동식 기중기. |
'부산진지역매축지비' 인근에 있는 '두모포왜관 표지석'은 매축 이전부터 부산과 일본의 상거래가 이뤄져 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관이라는 지명은 1678년 '초량 왜관'을 새로 지으면서 옛 왜관이라는 뜻에서 유래됐다. 초량 왜관은 중구 동광동·광복동 일대이다. 이곳은 당시 세계적으로 거의 유일한 일본인 거주구역이다.
구한말 1884년 지금의 부산역 일대가 바다였던 시절. 청나라는 그 바다로 들어와 영사관을 세웠고, 청나라 점포들이 속속 생겨났다. 당시 사람들은 이곳을 왜관에 대응하는 말로 '청관'이라고 불렀다. 일본인들은 이곳을 '지나(支那·중국) 사람이 많이 사는 곳이라고 해서 '시나마찌'라고 했다. '재팬타운'에 이어 '차이나타운'이 생긴 것이다. 현재 '동구 차이나타운 특구'(일명 상해거리)로 화교학교가 남아 있다. 이곳에 세워진 '상해문'은 중화 문화권과 부산의 교류 거점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곳은 6·25전쟁 때 참전한 미군을 포함한 UN군을 위한 유흥가 '텍사스촌'이었다. 원로 소설가 최해군 선생은 "텍사촌이라 불린 것은 미군이 권총을 차고 서부 활극을 연상시키는 장면을 자주 연출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텍사스촌은 원래 중앙동에 있었지만 1953년 부산역전 대화재 이후 이곳으로 옮겨왔다. 주한 미군이 줄면서 부산항에 들어오는 외국 배의 선원이나 미국 군함의 장병을 대상으로 장사했다. 현재 '청소년 출입금지' 표지판은 녹슨 채 타국의 뱃사람으로 흥청거렸던 추억을 기억하고 있다. 당시 큰 군함이 오면 5000명이 넘는 군인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고 한다.
1980년대 이후 러시아 상인과 선원이 몰리면서 지금의 '초량 외국인상가'로 변모했다. 부산대 사회학과 김희재 교수는 "중화요리 음식점이 몰려 있는 상해거리는 러시아, 중국어, 영어 간판이 뒤섞여 있고 동시에 일본식 근대 건물이 남아 있는 글로벌한 공간"이라고 말했다.
■Korea-Global I.C Busan
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를 잇는 '부관페리'는 한일 대표 관광노선 중 하나이다. 이 부관페리는 1905년 일본의 '관부연락선'부터 이어져 100년이 넘었다.
관부연락선은 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하관)를 정기 운항하는 연락선으로, 일본 산요철도회사가 일본 동해도선과 구주선을 우리나라 경부선과 연결한 것이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강제로 일본 군인이 되기 위해 관부연락선에 몸을 실어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상징하는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관부연락선은 한국과 일본 간 물류와 여객을 수송하고 부산은 그것을 다시 전국으로 실어나르는 출발점이 됐다. 러시아에서 벽돌을 가져와 만들었고 청나라에서 온 유럽인들이 우리나라 최초의 부산세관(해관)을 운영했다.
한반도의 근대판 실크로드의 시작은 부산이다. 실크로드의 출발점이 다양한 문화의 집산지였듯이 부산이 그렇다. 지금 부산이 국제 허브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조선시대 왜관 설치 이후부터 이미 부산은 동아시아 교역과 교류의 네트워크 도시로 자리매김해 왔다. 따지고 보면 세계에서 들어오고 나가는 것 중 부산을 통하지 않은 것이 별로 없다.
부산은 접점의 도시다. 부산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국 사람의 모습과 옷깃을 스치며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부산에서 이국은 그리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오랜 역사 속에서 부산의 국제성은 우리의 삶 속에 배어 들었다.
# 국경 넘은 조선판 '로미오와 줄리엣'
- 영국여자 리즈와 조선남자 권순도
- 못다이룬 사랑, 영화·연극으로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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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Liz Hunt' 한 장면. 조선 청년 권순도가 리즈에게 말 타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
1888년 부산해관(현 부산세관)장으로 부임한 영국인 헌트(한국 이름 하문덕)의 딸과 조선 청년 권순도의 러브 스토리가 전해지고 있다.
헌트는 영국인 넬슨 로바트, 프랑스인 피리에 이은 세 번째 해관장이었다. 개항 초기 부산해관은 국제적 경험이 전무해 유럽 인사를 해관장으로 초빙했다.
헌트는 재임 기간 용미산을 깎아 매립하는 공사를 진행했다. 부산항 매립 공사의 효시다. 헌트가 집안일을 할 일꾼을 구했는데 헌트의 집에 들어온 이가 1870년 경남 양산군 상북면 대석리 가난한 농사꾼 집안에서 태어난 권순도였다. 권순도는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가 영어를 배우겠다고 마음먹은'개화 청년'이었다.
헌트에게는 리즈라는 19세의 외동딸이 있었다. 리즈는 타국 땅에서 외로움을 느겼다. 영국 아가씨에게 권순도는 말벗이자 친구였다. 영국 아가씨가 권순도에게 말을 태워 달라고 청했고 이를 계기로 둘은 가까워져 사랑에 빠졌다. 리즈가 권순도의 아기를 갖게 되자 화가난 헌트는 권순도를 권총으로 쏘아 죽이려고 했다. 순간 리즈가 권순도 앞을 가로막으며 차라리 자신을 죽여 달라고 애원했다.
결국 헌트는 딸을 데리고 홍콩으로 돌아가버렸다. 리즈는 홍콩에서 권순도의 아기를 낳고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편지로 전했다. 편지와 함께 큰 돈도 보냈다. 권순도는 이 돈을 밑천으로 동광동 번화가에 '권순도상회'라는 포목상을 차려 유명해졌다. 권순도는 이후 고향 양산 대석리로 돌아가 마을에 '세계인 환영비'를 세웠다. 영남대로를 따라 한양으로 오가는 길손, 특히 외국인을 집으로 초대해 숙식을 제공했다고 한다.
국경을 초월한 러브 스토리는 이용득 부산세관 박물관장이 '구한말 해관장의 러브 스토리'라는 글로 남겼고, 부산지역 영화인들은 2000년 초 'Liz Hunt'(감독 허종식·45분)라는 영화로 제작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했다. 극단 가마골은 2005년 '순도 100% 한국 청년'이라는 연극 작품으로 무대에 올렸다.
공동취재= 류영진 부산대 사회학 석사
공동기획= 국제신문·대안사회를 위한 일상생활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