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의 열기에다 건국의 흥분이 휘몰아치던 1946년 3월 25일, 서울운동장에 구름같은 관중이 모였다. 맞수 서울(경성)과 평양이 벌이는 제7회 경평(京平)축구 때문이었다. 그러나 38선으로 통행이 제한되면서 경평축구는 이게 마지막이 됐다.
경평축구는 1929년 10월 경성중학의 경성팀과 숭실학교의 평양팀이 서울 휘문고보 운동장에서 첫 경기를 가진데서 유래한다. 처음엔 '전경성군 대 전평양군 축구 대항전'이란 거창한 이름을 내걸고 사흘간 3차전 경기로 열렸다. 1회대회는 평양이 2승1무. 서울은 이듬해 2회대회에서 2승1패로 설욕했다. 회수를 거듭할수록 경평축구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당시 경평축구는 서울과 평양, 양지역 자존심까지 걸려 지금의 한·일전 만큼이나 치열했다. 제6회 대회때는 심판 판정시비가 지역감정으로 비화하면서 응원단 간 충돌로 11년간이나 중단될 정도였다. 경평축구가 열리는 기간 서울-평양 기차는 원정 응원단으로 미어터졌다. 승리한 도시는 거시적인 환영행사를 벌였다. 경평축구는 일제치하에서 민족의 단합과 반일정신을 키우는데 기여했다. 대회기간 일본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후 분단으로 인한 남북갈등은 서울과 평양간 스포츠 교류조차 얼어붙게 했다. 남북은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을 계기로 남북통일축구대회란 새 이름으로 서울과 평양을 오간 뒤 2002년, 2005년 두차례 더 경기를 했지만 그때 뿐이었다. 경평축구가 부활돼 서울-평양 기차가 응원단으로 시끌벅적할 날을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