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빵 하면 50년 된 '백구당'
- 59년째 깊은 곰탕 맛 광복동 '천안곰탕'
- 멋쟁이들의 양복집 SINCE 1948 '국정사'
- 민주화운동의 산실 중국음식점 '화국반점'
- 중앙동 '겐짱카레'… 더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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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를 기점으로 할 때
중앙동 동광동 일대는 부산의 원도심이라 할 수 있다.
이곳의 역사·예술·문화에
이야기를 입히면 이 일대는 부산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다.
박수현 기자 parksh@kookje.co.kr |
'부산여행'이라는 검색어로 인터넷 블로그를 탐색한다. 외지인들이 생각하는 부산의 매력 포인트를 알아보기 위해서다. 결과는? 해운대의 압도적 승리. 하늘이 내린 해수욕장을 중심으로 특급호텔, 쇼핑 위락, 근사한 건물에 고급 레스토랑, 근처 해동 용궁사까지 인기다. 초절정의 첨단·화려장대·디지털·쾌적. 해운대의 자랑이다.
그런데 이게 다일까? 충분한 걸까? 외지 친구들이 말한다. "친구야, 부산을 보여줘! 서울에도 뉴욕에도 도쿄에도 다 있는 거 말고, 부산만 갖고 있는 거, 세월의 더께가 앉아있는 부산의 지문 같은 거!" 이들이 원하는 '세월의 더께'가 뭘까. 쌓이고 쌓인 것, 그 속에 켜켜이 뭔가 들어있는 것일 텐데. 그건 뭘까, 어디 있을까? 파리든, 런던이든, 프라하든 여행자들은 먼저 구도심이나 오래된 장소에 들른다. 거기에 가야 그 도시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산에선 그게 뭘까? 어디 있을까?
■50년 토박이 빵집 백구당
조재붕(42) 씨는 '중앙동 아이', 영어로 '중앙동 키드(kid)'였다. 중앙동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는 현재 백구당 대표다. 백구당은 재붕 씨의 부친 조병섭 씨가 1959년 중앙동 소라계단 근처 도로변에서 창업한 빵집이다. 작년이 창업 50년, 올해부터 새로운 50년을 시작한다. 백구당은 중앙동 소라계단 근처를 뜬 적이 없다. 부산에서 창업 50년이 넘는 빵집은 백구당 말고는 찾기 어렵다. 모르긴 해도 해운대의 최첨단 빌딩숲에선 더 찾기 힘들 것이다.
"지금은 영업을 시작할 때 셔터를 올리고 마감할 땐 내리면 되지만, 제가 어릴 땐 낱개로 된 짝문을 일일이 붙이거나 떼내야만 했어요. 우리 가게엔 그런 짝문이 1번부터 13번까지 있었는데 아버지는 초등학생이던 제가 그 짝문들을 다 떼내고 바닥을 쓸고 유리를 닦으면 용돈 100원을 주셨죠." 그런 짝문을 '빈지'라고 했다. 재붕 씨는 백구당의 간판을 올려다 본다. "저 간판을 보며 중구 원도심의 힘을 느끼곤 합니다." 재붕 씨의 부친이 지은 이름인 백구당은 한자로 '白鷗'라 쓴다. 흰 갈매기라는 뜻이다. 롯데 자이언츠 야구할 때 울려퍼지는 '부산갈매기'는 50년 전에도 날고 있었던 거다. '부산갈매기'의 뿌리가 50년 된 원도심의 한 오래된 빵집 간판에도 깃들어 있다는 은근한 자부심.
■광복동 키드의 천안곰탕
김동현(50) 씨는 '광복동 키드'였다. 부산데파트 근처 기업은행 부산경남지역본부 뒤쪽에 있는 천안곰탕. 간판에 'Since 1951'이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올해로 59년 째를 맞는 광복동 한 가운데의 식당. 동현 씨는 천안곰탕 창업주의 장남이다. 100년 넘은 근대 건축물조차 보기 힘들게 돼버린 부산에서 '50년 빵집' 만큼이나 '60년 곰탕집'은 귀하다.
"광복동 역사는 제가 조금 알죠." '광복동 키드' 동현 씨는 광복동의 옛 이야기들을 선명히 기억한다. '도라무깡'을 잘라 식탁으로 쓰며 장사하던 '천안도라무집'(천안곰탕의 옛 이름) 시절. 광복동에서 돈을 엄청 많이 번 한 화교가 급작스럽게 망해갔던 슬픈 이야기. 부산시청이 근처에 있던 시절 명사들의 일화. "한창 땐 1500원 짜리 곰탕을 팔아 하루 300만 원까지 매상을 올린 적이 있죠." 하루에 곰탕 2000그릇을 팔았다는 이야기다. 1998년 부산시청이 연산동으로 옮겨가면서 갑자기 닥친 몰락을 생생히 목격한 동현 씨는 이렇게 말한다. "롯데백화점 광복점이 지난해 12월 문을 열고 원도심에 대한 문화적 관심도 높아지면서 이 지역은 확실히 살아나고 있어요. 이 지역 경기가 살아날 것이라 낙관합니다." 원도심의 오래된 장소들이 그 힘들었던 몰락기를 넘기고 의연하게 남은 저력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Since 1948' 양복점 국정사
광복로 입구 국정사에서 답을 찾아보기로 했다. 국정사는 '대한민국 양복 명장' 양창선 씨가 경영하는 유서깊은 양복점이다. 간판에 'Since 1948'이라는 글씨를 자랑스럽게 새겨놓았다. "원래는 창업주가 범일동에서 국정사라는 이름으로 시작했지요. 창업주가 1960년대 이 장소로 옮겨왔고 함께 일하던 제가 2대 사장에 이어 1981년 국정사를 인수했습니다." 그는 "성실함과 혼"으로 국정사의 대를 이어가면서 '60년 전통'을 자랑스러워한다. 오랜 세월 한 우물만 판 명장은 이렇게 말했다. "좋은 시절엔 누구나 잘 나가죠. 하지만 위기가 왔을 때 진정한 저력이 드러납니다. 하는 일에 생을 걸겠다는 혼이 있어야 해요. 해운대처럼 급속히 커진 지역이 가질 수 없는 세월의 향기가 원도심에는 있습니다. 원도심에 그런 혼을 가진 장소가 하나 둘 늘면 누구도 흉내내기 힘든 명품 지대가 되겠죠."
■1985년 5월 7일 화국반점 거사
백산기념관 옆 화국반점은 화상(華商)이 경영하는 중국음식점이다. 올해로 개업 30년을 맞았다. 이 중국집은 부산문화사에서 뜻깊은 장소다. 1985년 5월 7일 요산 김정한(1908~1996) 선생을 필두로 부산 문인들이 화국반점 2층에 모였다. 이들은 짬뽕국물을 앞에 놓고 '화국반점 거사'를 단행했다. 독재정권의 폭압에 맞서 민주화운동에 동참하자는 취지로 5·7문학협의회를 결성한 것이다. 5·7문학협의회는 뒷날 부산민족문학인협회로, (사)부산민족문학작가회의로, (사)부산작가회의로 이어지면서 부산 문학계의 중추 단체가 된다.
문인들은 자주 이런 이야기를 한다. "청마 유치환 선생이 돌아가시던 날 마지막으로 술을 자셨던 광복동 술집을 보존했어야 한다. 샤르트르가 자주 앉았던 카페의 좌석을 그대로 두고 문화관광자원으로 쓰는 파리를 보라." 그런데 정작 부산 문인들은 요산 김정한 선생을 기리는 요산문학제를 12회나 개최했으면서도 뜻깊은 '화국반점 거사'를 기념하는 행사는 한 차례도 열지 않았다. 문학제 뒤풀이조차 한 적이 없다. 스토리텔링과 문화유산보존을 강조하는 문인들이 정작 옛 모습 그대로 30년째 같은 주인이 지키고 있는 이 장소를 왜 이토록 외면했던 것일까.
당시를 생생히 기억하는 부산의 원로 문학인 최해군(84) 이규정(73) 김중하(71) 씨를 초청해 화국반점에서 고량주를 들며 이 불만을 털어놨다. "당시 문인들은 남포동 광복동 막걸리집에 주로 모였지. 그런데 5·7문학협의회를 결성할 때는 평소와 달리 밀폐되고, 널찍하고, 감시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던 거라. 그래서 잘 가지 않던 중국집에 모였지. 그러니 거사 뒤엔 잊은 것 같아." 하지만 원로들은 "그래도 이 장소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다. 역사·문화·예술에 이야기까지 있다면 마땅히 잘 가꿔 도시의 지문을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원로들은 조언했다.
■겐짱카레를 찾아간 이유
다행히 원도심에 예술을 심고 이야기를 입히는 작업이 중앙동과 동광동에서 진행 중이다. 부산시가 시행하고 부산문화예술교육협의회가 주관하는 원도심문화창작지대 조성사업이다. 40계단 일대 17곳의 공간을 임대해 예술가들에게 창작공간으로 3년 제공하면서 지역과 밀착한 다채로운 예술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이 핵심이다. 중앙동 동광동에 미술가 문학인 음악인들이 살면서 갤러리를 운영하고, 공연을 열고, 원도심 여행을 안내하며 문화적 향기를 입힌다는 뜻이다. 잘만 진행되면 원도심에 새로운 활력이 생길 것이다. 그때 원도심은 첨단의 신도시가 돈과 기술을 아무리 들여 가지려 해도 가지기 힘든 그 무엇을 갖게 될 수 있다.
중앙동 소라계단 옆 겐짱카레를 찾아간 이유가 있다. 겐짱카레는 2006년 8월 문을 열었다. 초기엔 손님이 정말로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주인 요시다 겐지(60·겐짱은 요시다 씨의 애칭) 씨의 손맛이 소문나면서 지금은 중앙동 명물이 됐다. 겐짱은 부산이 좋아 일본에서 은퇴한 뒤 중앙동에 정착해 겐짱카레를 열었다. 사람들이 떠나가기만 하던 중구 원도심에 자리를 잡고 또 하나의 명소를 탄생시킨 겐짱에게 물었다. 부산에 살아보니 어땠냐고. "친구들을 사귀게 된 것이 무척 좋았다"고 했다. 고향 일본이 그립지 않느냐고 물었다. 겐짱은 "죽을 때까지 부산에 살 것"이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겐짱이 만든 카레를 먹으며 사람이 찾아오는 원도심을 만든다는 것이 어렵기만 한 일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자꾸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