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고, 당당하고, 이야깃거리 넘치고, 품격 있는 도시. 이런 도시라면 누가 방문하고 싶지 않을까. 뉴욕, 파리, 바르셀로나, 싱가포르, 홍콩 같은 도시는 이미 그러한 경지에 닿아 있다. 이른바 '파인(fine) 도시'다. 부산이라고 그리 못될 이유가 없다. 그 조건과 현실을 키워드별로 짚어본다.
◇ Fun
경성대 강동진(도시공학과) 교수는 한 세미나에서 부산을 '웃음이 묻어나는 도시'라고 했다. 10여 년 부산에 살면서 내리고 싶은 작은 결론이란다. 부산만큼 웃을 수 있는 기회가 많은 도시는 그리 흔치 않다는 것이다.
"부산이란 도시 재밌어요. 정 깊은 따스함을 느낄 수 있는 미소가 있고, 말도 안 되는 일 때문에 허탈하게 웃는 실소, 또 마음을 열어놓고 껄껄(하하) 하고 소리내어 웃는 파안대소가 있습니다."
듣고 보니 그렇다. 부산만큼 다채로운 웃음을 만날 수 있는 도시가 많지 않다. 자갈치나 국제시장에서 터져나오는 왁자지껄함 속의 함박웃음은 돈 주고 살 수 없는 자원이다.
도시공간에서의 재미는 주로 길에서 만들어진다. 보는 재미, 먹는 재미는 물론 오감을 통해 확인하는 다양한 즐거움이 길과 거리에 녹아 있다. 최근 부산이 쇼핑·관광 명소로 부상하고 있는 것도 흥미로운 변화다. 지난해 3월 문을 연 세계 최대의 해운대 신세계 센텀시티점과 지난달 개장한 롯데백화점 광복점은 부산의 쇼핑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 전국에서 손님이 모여들고, 일본과 중국에서 관광객이 찾아온다. 부산을 찾은 외국 관광객은 2007년 167만696명, 2008년 181만7123명으로 8.8% 늘었고, 2009년에는 10% 이상이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이쯤 되면 맛난 부산 음식이 주는 재미를 빠트릴 수 없다. 부산의 참맛(珍味) 탐험이 필요해진 이유다.
부산은 한국 요트의 성지다. 바다로의 사고 전환, 또 다른 재밋거리는 요트가 실어나른다.
◇ Identity
"의복은 권력의 가장 우아한 표현이다." 의복을 통해 권력을 표현하고자 했던 패션의 역사를 요약한 말이다. 신분 제도는 소멸한 지 오래지만, 옷으로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은 아직도 남아 있다. 영화 '프리티 우먼'에서 보듯, 베벌리 힐스의 명품 옷이면 천한 거리의 여자도 귀부인으로 다시 태어난다.
소비자들은 자신이 사용하는 상품을 통해 정체성을 표현한다. BMW 자동차, 몽블랑 만년필, 혼마 골프채 등이 지속적인 인기를 누리는 배경이다. 명품이 사회적 이슈가 되면서 명품에도 나름의 품격을 구결하는 별칭들이 붙었다. 루이비통의 '3초백'은 맥럭셔리(Mcluxury)로, 오랜 세월 일정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는 에르메스나 할리 데이비슨 같은 브랜드는 '컬트(cult)상품'으로 통하고 있다. 말 그대로 숭배의 경지에 이른 브랜드라는 의미다. 도시 역시 자기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을 때 '명품'의 지위를 얻는다. 명품도시가 되는 길이 '컬트(cult)상품' 되는 길과 별반 다르지 않음이다.
부산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부산시는 지난 2004년부터 브랜드 슬로건을 '다이내믹 부산(Dynamic Busan)'이라 내걸었지만 호응은 높지 않은 것 같다. 국가적으로 내건 '다이내믹 코리아(Dynamic Korea)'와 겹치는 것은 아쉬움이다. 부산의 랜드마크와 미래 디자인을 통해 정체성을 짚어본다.
◇ Narrative
에르메스의 켈리백(Kelly Bag)은 패션에 관심 있는 모든 여성의 로망이다. 1930년대에 만들어진 이 작은 백이 세계 명품시장에서 변함없는 인기를 누리는 비결은 바로 이야기의 힘이다.('켈리백'은 모나코의 왕비가 된 세기의 신데렐라 그레이스 켈리가 임신한 배를 가리기 위해 즐겨 사용했다 하여 붙여진 애칭이다)
이야기는 힘이 세다. 뉴질랜드는 영화 '반지의 제왕' 촬영지라는 이유만으로 관광객이 연평균 5.6% 증가하고, 관광수입만 연간 4조 원을 벌고 있다. 18세기 산업혁명, 20세기 말 정보혁명에 이어 '이야기 혁명' 시대가 도래했다. 홍사종 미래상상연구소 대표는 이를 '이야기 경제'로 정의한다. 이야기 경제는 무형의 이야기 자산으로 가치를 창조해내는 상상력의 경제다.
도시도 이야기를 가져야 힘을 얻는다.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주연한 영화 '비포 선셋'은 파리의 뒷골목을 하염없이 걷고 싶게 만든다. 이야기가 도시 브랜드에 주는 영향은 생각보다 실제적이다.부산은 이야기의 보고다. 수많은 외침을 겪고 근현대사의 격랑을 헤쳐오며 얻은 자산이다. 조선통신사와 왜관은 지금 당장 건져 올려야 할 이야기의 금맥이다. 원도심과 산복도로는 숨쉬는 이야기 현대사다.
◇ Elegance
영국 도싯지방의 파운드베리는 휴먼 신도시로 유명하다. 가 보면 마치 오래된 유적지에 관광 온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위압감을 주지 않는 저층 건물, 보행 중심으로 설계된 골목길, 방사선형의 도로 구조는 방문자들을 편안하게 해준다. 파운드베리가 여유롭고, 우아하며, 안전한 신도시의 대명사가 된 것은 휴먼과 감성에 기초한 디자인 정신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디자인이 화두다. 서울시는 지난 2007년 10월 국제디자인연맹(IDA)에 의해 '세계 디자인 수도'로 선정된 후 야심찬 서울 변화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거리가 바뀌고 광화문이 옷을 갈아입었다. 서울을 필두로 각 지자체들의 디자인 도시 경쟁도 뜨겁다. 디자인이 도시민과 관광객들에게 최고의 경험을 제공하는 가장 효과적 수단임을 알기 때문이다. 부산은 여전히 미지근하다. 21세기 감성시대를 이끌어 갈 진정한 리더, 이매지너(Imaginer)가 없기 때문인가. 강력한 상상의 힘으로 미래의 가치를 현실의 성공으로 이끌어내는 창의적 지도자 말이다. '파인(FINE) 부산'이 찾는 지도자가 바로 이런 이매지너다.
부산디자인센터 김재명 원장은 "살기 좋은 도시가 되려면 FINE 외에도 도시의 향기(perfume), 소리(sound), 색(color) 같은 개념을 추가할 수도 있다"면서 "어쨌든 에너지가 충만한 도시로 바꿔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