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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사랑 잊지 않을게요 "- 20일 경기도 용인시 천주교 묘역에서 열린 고 김수환 추기경의 하관식에서 신자들이 김 추기경의 묘에 흙과 국화꽃을 뿌리고 있다. 이용우 기자 ywlee@kookje.co.kr |
고 김수환 추기경의 사목 표어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였다. 김 추기경의 일생 역시 그랬다. 그는 항상 우리 사회 소외계층과 약자의 손을 따뜻하게 잡았다. 언제나 겸손했지만 불의에는 바른 소리로 맞섰고, 종교의 벽을 넘어 온누리에 사랑을 전했다. 정말 '모든 이를 위하여' 살았고, 이제 국민들의 마음을 감동으로 촉촉히 적신 채 하늘로 떠났다.
평생 자신의 모든 것을 나눴던 고인은 선종 이후에도 사랑 희생 화해 양심이라는 위대한 유산을 한국 사회에 남겼다. 그는 진정한 이 시대의 성자였다.
낮은 삶, 거대한 양심
김 추기경은 '낮은 자'의 친구이자 든든한 후원자였다. 경제 성장만이 지상과제로 여겨졌던 1960~1970년대 그는 산업화 과정에서 희생된 노동자들에게 눈을 돌렸다. 1967년 5월 강화도 삼도물산 노조원 해고 사태 때 '사회 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교단 공동 성명'을 발표하며 처음으로 사회를 향해 메시지를 던졌다. 이후에도 동일방직 사건 등 노동 탄압 사례가 있을 때마다 추기경은 노동자의 인권을 지키는 일에 앞장섰다. 철거민 장애인 탄광촌 빈민촌 등 삶이 궁핍한 이들의 곁에는 늘 그가 있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줘야 한다'는 믿음을 단 한순간도 잊지 않았다. 정진석 추기경은 20일 장례미사 강론에서 "김 추기경님이 사목 활동에서 우선 순위를 둔 것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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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석 추기경 주관으로 열린 김 추기경의 하관식. 이용우 기자 |
그는 이처럼 낮은 삶을 살았다고 해서 결코 유약하지 않았다. 고비 때마다 양심의 소리를 내는 '민주화의 등불'이었다. 인권과 민주화 운동 현장에서 소신있는 정치적 발언을 쏟아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유신체제가 막 시작된 1971년 전국에 생중계된 미사 말미에서 박정희 정권을 강도 높게 비판해 방송이 중단된 적도 있었다.
정국이 혼란스러울 때마다 김 추기경은 용기있는 시국성명을 냈고 권력의 폭주에 제동을 걸었다. 1974년 지학순 주교를 시작으로 1976년 명동 3·1절 기도회, 1978년 전주교구 7·18 기도회 등에서 사제들이 잇따라 구속되는 상황에서도 성명과 강론으로 자유 언론과 인권, 민주 회복을 역설했다.
이같이 거침없는 행동은 결국 교회 내부에서조차 정치 개입에 대한 찬반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그의 행보는 중단될 줄 몰랐다. 1980년대 명동성당은 민주화 운동의 해방구였다. 추기경은 1980년 5·18 민주화 운동 당시 모든 신자들에게 광주를 위한 특별 기도회를 요청했고, 6·10 국민운동 때는 명동성당에 진입한 시위대를 강제 연행하려던 정부에 단호히 저항했다.
벽을 허문 사랑으로 이룬 사회 통합
지난 19일까지 명동성당을 찾은 조문객은 38만7420명. 김 추기경이 편견과 벽이 없는 삶을 살았듯이, 그의 선종을 애도한 조문객도 종교와 계층의 구분이 없었다. 분열과 갈등을 봉합하고 화해와 평화를 추구해 온 그의 리더십이 죽어서도 힘을 발휘한 것이다.
그는 마지막까지 장기 기증으로 사랑을 실천했다. 그리고 선종하는 순간에도 평화와 화해를 강조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거부하지도 않았다. 추기경의 안구 기증은 바이러스처럼 번져 관련 단체에 장기 기증 의사를 밝히는 신청이 쇄도하고 있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가수 장윤정 서인영 박정아 등도 각막 또는 조직 기증을 약속했다. 결국 고인은 '사람은 사랑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가장 중요한 교훈을 온몸으로 남겼다.
김 추기경은 신앙인으로서도 손색이 없었다. 서울대교구장을 맡은 30년간 서울대교구는 교세를 눈부시게 확장해 48개 본당, 신자 14만여 명에서 197개 본당, 신자 121만여 명으로 8배 넘게 불어났다. 그는 한국 사회에 천주교회의 위상을 바로세우려 노력하면서 한국 가톨릭의 도약을 이끌었다. 서울대교구장에서 퇴임한 뒤에도 김 추기경이 쌓아놓은 훌륭한 신앙인의 이미지는 천주교 교세 확장에 밑거름이 됐다.
특히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로부터 추기경으로 서임된 일은 한국 가톨릭사에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한국인 첫 추기경이었고 당시 전 세계 추기경 136명 가운데 최연소였다.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에서 인정받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