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 잣대로 시시비비를 따지는 냉엄한 심판자가 아닌, 때로는 이웃의 사소한 다툼을 해결하는 '동네 이장'이 된다는 한 재판장의 진솔하고 재치있는 글이 화제다. 부산지법 민사28단독 박준석 판사는 최근 부산지법의 소식지(주보)에 '소액재판장의 일기'란 제목으로 재판 담당 판사의 솔직담백한 심경을 담은 글을 실었다.
합의부 배석판사를 지내다 올해 처음 재판장을 맡은 박 판사는 '판사가 너무 깔끔해도 국민들이 괴리감을 느낀다'는 말을 되새기며 재판이 있는 날엔 면도도 대충 한다고 이번 기고에서 털어놨다. 재판 전날 밤 정리한 재판 메모지를 읽으면 마치 시험을 몇 시간 앞둔 수험생처럼 긴장감이 밀려오고 막상 재판이 끝나면 녹초가 된다는 '신참' 재판장의 고백도 실려 있다.
박 판사가 맡고 있는 사건은 2000만 원 이하의 돈을 청구하는 소액사건. 채권자인 원고 측은 재판장이 돈을 갚지 않는 채무자(피고)를 준엄하게 꾸짖어주고 돈을 받을 수 있길 기대하는 반면 채무자들은 딱한 사정을 내세워 얼마의 돈이라도 면제받길 원한다.
박 판사는 빌린 돈 300만 원을 파출부 생활을 해서 조금씩 갚겠다는 한 아주머니와 5년간 이자까지 합쳐 600만 원은 받아야겠다고 나선 한 아저씨의 요구를 절충한 적이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재판장의 적절한 몸짓 및 표정과 분위기 주도력.
그는 "피고의 형편이 너무 딱한 것 같은데 원고가 남자답게 이자 부분은 화끈하게 포기하고 원금만 받으시죠"라며 분위기를 잡았다. 하지만 원고가 이를 거부했다. 원고의 말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그는 피고에게 "돈을 빌렸으면 제때 갚아야지, 그러면 되겠습니까. 원고가 돈 욕심이 많지 않아서 망정이지 600만 원 물어줄 뻔했어요"라고 큰소리를 쳤다. 이어 원고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그럼 한 달에 30만 원씩 열 달간 갚으세요"라며 슬쩍 이자 부분을 뺐다. 결국 박 판사는 "피고의 재산을 들춰내 집행할 경우 시간도 많이 들고 번거롭기까지 하다"는 말로 원고를 설득시켜 가까스로 조정을 성립시켰다.
민사재판에서 법원은 소극적인 제3자의 입장이다. 판사는 분쟁의 해결사보다는 엄정하고 냉철한 심판자에 가깝다. 하지만 소액재판장은 때로는 동네 이장처럼 양측의 싸움을 말려야 하는 역할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 전 박 판사는 한 달에 10만 원씩 갚겠다는 피고와 20만 원씩 받겠다는 원고 사이에서 15만 원은 어떠냐고 '흥정'했다. 양쪽 모두 동의하지 않아 다시 '17만 원'을 제시하니 방청석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순간 그는 '나 판사 맞아?'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박 판사는 "기회가 되면 심판자의 모습을 던져버리고 동네 이장이나 남의 일에 끼어들기 좋아하는 동네 아저씨가 된다"며 "당사자들의 싸움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종결시켰을 때 분쟁을 해결했다는 조정의 묘미와 보람을 맛보게 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