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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프런티어 해양인 열전] <23> 항로표지원 김종호

등댓불로 뱃길 밝힌 36년…그 헌신이 선원 구명줄이었다

  • 김정하 한국해양대 글로벌해양인문학부 교수
  •  |   입력 : 2022-11-28 19:09:20
  •  |   본지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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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식 등대는 일제 침략의 촉수
- 미군의 폭격 등에 쑥대밭 되기도
- 1962년부터 오지 마다않고 근무
- 차례는 걸러도 등탑 고사는 지내

- 임신한 아내 위험 처하는 등 설움
- 선장·선원 감사와 환대에 다 잊어
- IT기술 접목으로 항로표지 발달
- 해양강국 이면 등대수 공헌 있어

바다가 평온하면서도 거칠듯 해양인의 삶도 이중적이다. 열렬한 주목도 받지만 무관심에 파묻히기도 한다. 흔히 ‘등대지기’라 불리던 항로표지원의 삶이 한동안 그러했다.
김종호(오른쪽) 선생이 지난 17일 항로표지원으로 처음 부임한 부산 영도항로표지관리소를 찾아 이곳을 관리하는 후배 격의 송주일 주무관을 만나 등대지기의 삶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정하 교수 제공
인류 최초의 등대는 기원전 이집트가 파로스섬에 세웠고 고대로부터 한국에서도 선박의 항해를 돕느라 횃불과 봉화, 꽹과리 등을 사용했다. 근대식 등대는 대한제국기에 일본인이 주도했고 일제 치하에는 한반도가 민속학자 주강현이 갈파했듯 ‘제국의 등대가 비추는 침탈 대상’이 되었다. 등대 관리와 함께 통신, 기상관측, 군함과 비행기 감시까지 담당한 등대장은 해군장교나 고등관이었다.

1906년 목도등대로 개설돼 116년째 뱃길을 인도해온 부산 영도항로표지관리소 전경.
하지만 태평양전쟁 통에는 미군이 등대를 폭격했고 해방 직후엔 한국인이 그 파괴에 가세했다. 가까스로 해방 1년 후부터 등대 복구와 항로표지원 배치에 나섰지만 항로표지원은 제대로 대우받지 못했다. 노래와 문학작품의 찬사와 달리 그들은 전화는 물론 경우에 따라 식수도 없는 낙도에 유리되었다. 1962년 부산 영도등대에서 시작되어 1998년 울산 간절곶등대에서 끝난 김종호 선생(84)의 36년 근무도 시종 그러했다. 그래도 열악한 여건에서나마 항로표지원이 등대를 지킨 덕에 한국은 2000년대 이후 해양강국이 되었고 김 선생도 그런 ‘무명(無名)의 수훈자’ 중 한 사람이다.

김종호는 1938년 오늘날엔 부산 강서구의 일부인 가덕도 동선리에서 수산업자 김영주와 정기분의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선 선주로 일본에 수산물을 수출하던 부친은 발이 넓었고 본부인과 사별한 뒤 일본에서 미모가 출중했던 김종호의 모친을 만났다.

유복했던 김종호의 집안은 해방되던 해 부친이 운명하고 일본과의 뱃길이 끊기면서 갑자기 기울었다. 한동안 고향에 머물다 형수와의 불화로 부산으로 나와보니 피란살이 뒤끝의 혼란에 깡패짓을 강요하는 동네 형들 탓에 편한 날이 없었다. 결국 야간고교를 다니는 둥 마는 둥 하다 해병대에 자원입대하고서야 그 곤경을 벗어났다.

경북 포항 호미곶에 있는 국립등대박물관의 전시 유물 중 항로표지원 제복.
군에서 제대한 1962년 해병대 보급정비단에서의 근무경력과 고교에서 익힌 기술 덕에 항로표지원으로 특채됐다. 해무청 항로표지양성소는 폐쇄됐지만 교통부 해운국 설치와 항로표지법 공포로 각지에 등대가 들어서고 현지에서 항로표지원을 채용하던 시절이었다. 너나없이 배를 곯던 시절에 직장 얻은 것만도 천행이라 열악한 근무 여건이나 박봉은 탓할 형편이 아니었다. 많아야 4명이 3교대로 감당하는 근무에서 간혹 벌어지는 갈등이나 부당함도 참아야 했다. 그러면서도 등불 점등과 소등, 축전지 충전, 안개 발생 시 무신호(霧信號) 작동, 기상관측 등 임무에서는 한 치의 착오나 실수도 용납되지 않았다.

“항로표지원은 무조건 참아야 했다. 우리가 그렇게 일해야 선원들이 안심하고 항해를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왼쪽 팔뚝에 ‘忍耐’ 문신이 선명한 김종호 선생은 그런 인고(忍苦) 탓인지 근무경력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명절에 조상을 위한 차례는 걸러도 등탑에 바치는 고사만은 잊지 않았고, 전국 어느 바닷가를 가든 등댓불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는 버릇이 몸에 뱄다고 말했다.

힘든 건 가정생활이었다. 혼인을 위한 몇 번의 맞선에서는 ‘등대지기’란 이유로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다행히 가덕도등대에 근무하던 스물아홉에 이웃집 처녀가 청혼을 받아줬지만 그녀 역시 오지에 들어가선 한동안 마음을 추스르지 못했다. 1966년에는 첫아들을 얻으면서 아내를 잃을 뻔했다. 폭풍우 거센 밤 거제도 서이말등대 관사에서 시작된 아내의 산통에 그는 시오릿길을 뛰어 마을로 내달렸다. 가까스로 등대 아래 바닷가에 배를 대놓고 산모를 지게에 앉혀 비탈길을 내려갔지만 요동치는 배에 태우기까지는 몇 차례나 목숨이 오가는 순간을 넘겼다.

항로표지원들의 살림은 오랫동안 기본급여만 받던 봉급에 수당과 부식비가 덧붙어도 여전히 빠듯했다. ‘표지선’이라 부르는 보급선이 결항하면 생필품마저 부족했다. 그래서 개중에는 가족들이 텃밭을 일구고 가축을 사육하는 사람도 있었고 근무지 인근의 관광지에서 아내들이 기념품점이나 횟집을 운영해 가계를 돕기도 했다.

그들의 존재감은 호칭이 ‘등대수’에서 ‘등대원’, ‘항로표지원’으로 바뀌어도 여전히 미미했다. 어쩌다 본청에 들어가도 과장 계장이 누군지 몰랐고 윗사람들 역시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외진 곳만 돌며 근무하니 인맥을 쌓기도 어려웠다. 그래도 그들이 개의치 않은 건 선원들에게서 감사와 환대를 받기 때문이었다. 어쩌다 술집에서 마주친 선장들은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다”며 진심 어린 술잔을 건네곤 했다. 실제로 ‘13초에 1 섬광’, ‘20초에 1 섬광’ 식으로 위치를 일러주는 등대 불빛은 밤바다를 운항하는 선원들에게 구명줄이나 다름없었다.

지난 17일의 맑은 오후, 김종호 선생은 첫 부임지였던 부산 영도항로표지관리소를 찾았다. 등대장으로 퇴직한 지 24년 만이었고 전직 항로표지원들 모임 ‘등우회’가 회원의 감소로 해체된 직후였다. 후배 격인 송주일 주무관을 만나서야 그는 근무이력을 확인했고, 축전지를 고치느라 고생한 경험이며 수은회전식등명기 수은을 도난당한 사건 등을 떠올렸다. 태종대 ‘자살바위’에서 마주친 여인의 자살을 끝내 막지 못했다는 그의 회고에 송 주무관이 자신도 엇비슷한 상황에서 119의 도움으로 생명을 구했다고 말하자 그제야 위안받은 표정이 되었다.

이날의 방문은 김종호 선생에게 위안 이상의 만족감을 안겨줬다. 그는 항로표지원이 일반직으로 전환되면서 누구 못지않은 급여를 받고 근무환경이 자동화된 사실을 흡족해했다. 사라호태풍 당시 파도가 타고 넘으며 등대 위에 바위를 올려놓은 오륙도의 무인화를 다행스러워했다. 영도에서 부산 내항과 외항, 북항대교, 남항대교 등표와 부표를 관리하는 시스템에는 찬탄을 보냈다. 예전엔 간혹 주민의 예식장으로 쓰던 등대가 교육과 체험, 전시를 위한 문화공간이 되었다는 송 주무관 말을 경청했다. “이제 등대는 관광객과 지역주민에게 친숙한 시설만이 아니라 미래세대에게 해양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학습의 장이 되고 있다.”

20여 년 전부터 전국에 세워지기 시작한 ‘월드컵등대’ ‘젖병등대’ 등 테마등대는 그 자체가 관광상품이다. 등대전문가인 정태권 한국해양대 명예교수는 해양학과 공학, 기상학 등이 집약된 항로표지의 발달은 무한하리라 보았다. “자율운항선박 개발 등으로 앞으로도 항로표지는 여전히 중요하게 쓰일 것이다. 따라서 위성 기능이나 IT기술을 접목한 항로표지 선진화에 더욱 진력해야 한다.”

덧붙여 오병택 국립등대박물관 관장은 항로표지원의 공헌을 포함시킨 등대문화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항로표지의 발전 못지않게 항로표지원들의 헌신적인 삶도 항로표지 유물과 더불어 해양문화자원으로 발굴, 보존해야 한다.”

‘등대문화유산 보존’과 ‘지속가능한 등대 관리 비전’은 2018년 인천 세계등대총회가 채택한 선언문의 골자다. 그 취지에 맞게 코로나 전까지 매년 100만 명을 맞이하던 포항 호미곶 국립등대박물관은 올해 7월 1일 ‘세계항로표지의 날’을 기해 새 모습으로 재개관했다. 그곳에서 ‘등대 역사’와 ‘등대 유물’ 등의 전시를 접하니 자신을 바쳐 뱃길을 지켜온 항로표지원들의 삶이 새삼 돌아다 보였다. 그 ‘무명의 헌신’에 비추어 보니 노래 ‘등대지기’의 가사 “거룩하고 아름다운”이 결코 지나친 레토릭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도움말씀 주신 분 = 정태권 한국해양대 명예교수, 오병택 국립등대박물관 관장, 송주일 영도항로표지관리소 주무관

※ 공동 기획=국제신문, 한국해양수산개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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