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건너가 1946년 야간고 졸업
- 남미 천연수지 최고 껌으로 인기
- 1967년 롯데제과 세워 모국 투자
- 국내 첫 로열티 없는 호텔 운영
- 무차입 경영 IMF사태 때도 거뜬
- 말년에 두 아들 형제의 난 겪기도
19일 영면한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은 일제강점기 일본 유학 도중 소규모 식품업으로 출발해 한일 양국에 걸쳐 식품·유통·관광·석유화학 분야의 대기업을 일궈낸 대표적인 자수성가형 기업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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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롯데그룹 창업주인 신격호 명예회장이 1989년 7월 12일 서울 잠실 롯데월드 개관식에 참석해 개관 테이프를 자르고 있다. 롯데그룹 제공 |
일본에서 기업가로 성공한 신 명예회장은 한일 수교 이후 한국에 투자의 길이 열리자 1967년 롯데제과를 시작으로 호텔롯데, 롯데쇼핑, 호남석유화학(현 롯데케미칼) 등을 잇달아 창업하거나 인수하며 롯데그룹을 재계 5위의 대기업으로 만들었다.하지만 그는 말년에 롯데그룹 후계 구도를 불분명하게 하면서 두 아들인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과 신동빈 한국 롯데그룹 회장 간의 이른바 ‘형제의 난’에 휘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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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격호 명예회장이 젊은시절 롯데제과 공장을 돌아보는 모습. 오른쪽 사진 왼쪽부터 가사도우미,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신동주 SDJ 회장, 부인 시게미츠 하츠코. 연합뉴스 |
1921년 11월 3일 울산 울주군 삼남면의 영산 신씨 집성촌에서 아버지 신진수와 어머니 김필순 씨 사이에서 5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가 현재의 와세다대 이학부인 와세다 고공(高工) 야간부 화학과를 1946년 졸업했고 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다. 한국에서 말을 돌보는 일을 하다가 돈을 벌 작정으로 일본에 가기로 결심하고 부관연락선에 밀항으로 몸을 실었다.
1947년 4월 신 명예회장은 롯데의 상징이자 뿌리인 ‘껌’을 사업 아이템으로 주목했다. 미군의 군수품을 흉내 낸 조악한 품질인 초산비닐 수지 껌이 넘쳐날 때 그는 남미산 천연수지로 당시 최고 수준의 껌을 만들어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성공의 토대 위에 1948년 6월 마침내 자본금 100만 엔, 종업원 10명의 주식회사 롯데가 설립됐다.
상호인 롯데는 신 명예회장이 고학생 시절 밤새워 읽었던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이름에서 따왔다. 이 여인처럼 모든 제품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라는 의미였다.
그는 1950년 재일 한국인이 많은 신주쿠구 신오쿠보에 껌 공장인 롯데 신주쿠공장을 설립했다. 1959년 롯데상사, 1961년 롯데부동산, 1967년 롯데아도, 1968년 롯데물산, 주식회사 훼밀리 등 유통업으로 일본의 10대 재벌이 됐다.
신 명예회장은 1967년 한국 롯데제과를 설립하며 모국에 투자를 시작했다. 이후 그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이른바 ‘대한해협 셔틀 경영’을 시작한 셈이다. 그 뒤 한국에서도 사업을 다른 분야로도 확장해 1973년 호텔롯데, 롯데전자 등을 설립했다.
특히 호텔롯데는 국내 최초의 로열티 없는 독자 호텔 브랜드였다. 1974년 칠성한미음료를 인수해 롯데칠성음료로 상호를 변경했고 평화건업사를 사들여 롯데건설로 키웠다. 중화학 분야에도 진출해 1979년에는 호남석유화학(현 롯데케미칼)을 인수했고 같은 해 롯데쇼핑을 설립했으며 1982년에는 롯데 자이언츠를 세웠다. 그는 1997년 IMF 외환 사태를 큰 탈 없이 보냈는데 무차입 경영 원칙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 명예회장은 93세가 되던 2015년 장남 신동주 전 부회장과 차남 신동빈 회장 간에 벌어진 경영권 분쟁에 휘말렸고 이 과정에서 ‘정신건강 이상설’이 제기되며 불행한 말년을 보냈다. 배임과 횡령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았고 재판에 넘겨져 징역 4년과 벌금 35억 원을 선고받았다.
정옥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