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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8년 12월~1979년 3월 남북호의 크릴 시험조업 성공을 다룬 국제신문 기획기사. |
- 엔더비해서 대륙 48㎞까지 접근
- 거대한 빙산·유빙에 막혀 실패
- 1985년 지질硏 간부 보고 누락
- 해양硏, 탐험·연구 주도권 잡아
국제신문이 연재해온 '부산을 극지 연구 허브로' 기획시리즈는 잊힌 우리나라의 극지 진출사를 재조명하고, 새로운 사실을 발굴하는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최초 남극 대륙을 밟은 이병돈 교수
고 이병돈(1928~95년) 부산수산대(현 부경대) 교수가 미국 텍사스 A&M대학 박사과정 유학 시절 미국-아르헨티나 공동남극해양조사단 연구원으로, 아르헨티나 해군 조사선을 타고 남극 대륙의 알미란테 브라운 기지를 방문했다. 이는 1978년 12월~79년 3월 우리나라 첫 남빙양 크릴 시험조사선 '남북호', 1985년 11~12월 첫 남극관측탐험대의 남극 진출보다 각각 15년, 22년 앞선 것이다. 이런 내용은 국제신문 1965년 11월 20일 자에 '남극대륙을 밟은 사나이, 부산수대 이병돈 교수'라는 제목의 기사로 대서특필됐다.
■남빙양 크릴 시험조업 때 상륙 시도
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 1978년 12월 7일부터 1979년 3월 7일까지 91일간 남북수산 '남북호'(5549t·선장 이우기)의 남빙양 크릴 시험조업에는 국제신문 박두기 정경부 기자(당시 입사 3년 차)를 비롯해 취재진 6명이 동승해 죽을 고비를 넘기며 세계 8번째의 남빙양 진출을 기록했다. 남북호는 엔더비해에서 남극 대륙 30마일(48㎞)까지 접근했지만, 거대한 빙산과 유빙에 막혀 상륙에는 실패했다. 박두기(66) 전 편집국장은 11일 "배에서 다들 구명보트를 띄워 남극 대륙 상륙이 가능하리라 생각했지만, 바다 위에 무수히 산재해 있는 얼음 파편은 좌초에 따른 죽음의 공포감마저 자아내게 했다"고 회상했다.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이 그때처럼 실감나게 느껴진 적도 없었다"고 덧붙였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빙산은 전체의 6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같은 남빙양 크릴 시험조업에 앞서 국제신문은 1977년 1월 18일 자 1면에 '남극새우를 잡아라'라는 기사를 통해 200해리 시대를 맞아 남빙양 어장 개발의 필요성을 보도했다. 이 기사가 당시 수산청의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다.
■극지 주도권, 해양이 쥔 것은 우연
국내 극지 연구 및 탐사 분야에서 해양 분야가 주도권을 잡은 것은 우연인 것으로 확인됐다. 1985년 민간 주도로 첫 남극탐험이 이뤄졌는데 한국해양소년단연맹(총재 윤석순) 측은 한국과학기술원 부설 해양개발연구소와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 과학자를 파견해 달라는 공문을 보냈다.
해양개발연구소의 당시 소장이었던 허형택 소장은 "과학자는 있는데 자금이 없다"면서 과학자 파견에 긍정적인 회신을 해양소년단연맹에 보냈다. 해양개발연구소는 남극 탐험에 장순근(미고생물학) 최효(기상학) 박사를 파견했다. 1명의 자금은 해양개발연구소가, 나머지 1명의 비용은 해양소년단연맹이 부담했다.
반면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은 중간 간부가 그 공문을 받고 "해당 사항 없음"이라는 회신을 보냈다. 그 중간 간부는 당시 원장이었던 박긍식 과학기술부 장관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 이를 알게 된 박긍식 원장은 땅을 치고 후회했다고 한다. 1987년 12월 과학기술부 장관이 된 박 원장은 남극 세종기지 준공식 때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중간 간부가 자신에게 보고하지 않은 것을 뒤늦게 알았다. 지질자원연구원 간부의 보고 누락으로 지금까지 남극 탐험, 극지 연구의 주도권은 해양 분야가 잡게 됐다. 현재 극지 연구의 주무 부처는 해양수산부다.
■첫 남극탐험대 4인방 '부산 사나이'
1985년 우리나라 최초 남극 관측탐험대를 꾸려 탐사를 이끈 윤석순 한국해양소년단연맹 총재(탐험대 단장·현 한국극지연구진흥회장, 부산고) 장순근 해양개발연구소 연구원(부산고) 최효 해양개발연구소 연구원(현 강릉원주대 대기환경과학과 교수, 경남고) 이동화 대원(현 남경엔지니어링토건 대표, 금성고)이 모두 부산 출신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우리나라 남극 탐험 1세대로 한국 극지 연구와 탐험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윤석순 회장, 장순근 박사, 이동화 대표는 지난 2월 남극 장보고과학기지 준공을 계기로 극지의 중요성을 청소년에게 교육하고 체험하게 할 극지박물관·체험관 건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박물관이 들어서면 소장품을 기증하겠다는 의사도 밝혔다. 이에 따라 극지 연구 허브이자 극지 항해 출발지인 부산에 극지박물관·체험관·극지 연구 및 산업을 포함한 '극지 타운'을 조성하자는 구상이 탄력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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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배에 동승한 박두기 전 편집국장이 찍은 화보. 전민철 프리랜서 jmc@kookje.co.kr |
# 남북호 동승 박두기 前국장
- 남극 원양어업 활성화 디딤돌
- 태풍 탓 수차례 죽을고비 넘겨
- 크릴 첫 어획 감격 잊을 수 없어
1978년 12월~1979년 3월 남북호의 남빙양 첫 크릴 시험조업에 동승한 국제신문 박두기 전 편집국장(당시 정경부 3년 차 기자)은 '남빙양 3만 마일'이라는 동승기를 12회에 걸쳐 연재했다. 이와 별도로 국제신문은 남북호 이우기 선장, 박형관 어로장, 임기봉 수산진흥원 연구관과의 좌담 및 '이것이 남빙양이다'는 화보도 실었다.
동승기와 좌담을 보면 남극해 진출에 관한 비사((秘史)가 소개돼 있다. 출발부터 순조롭지 못 했다. 정부 융자 1억5000만 원으로는 채산성이 맞지 않아 선사 대부분이 출어를 포기했다. 남북수산이 장래를 내다보고 뛰어들었다. 부산 출항 후 3일 만에 특수 제작한 크릴잡이 그물을 올리는 모터가 고장 나 대만 고웅항으로 회항해 열흘간 정박했다. 백야 현상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고,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넘겼다. 남극 엔더비 어장에서 사라호 태풍을 능가하는 태풍을 만났는데 5549t급 배도 일엽편주에 불과했다. '이 광경을 필름에 담기 위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으나 불가능했다. 겨우 밀치고 나가니 꽁꽁 언 빙판 위에선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고 바람에 날려갈 판이었다. (…) 겨우 선실에 기어들어 와서야 "휴" 한숨을 쉬었다'.(9회) 박 전 국장은 당시의 고생을 동승기에 '황천(荒天) 항해'로 자주 표현했다.
크릴을 처음 건져 올린 감격을 잊을 수 없다.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크릴에 입맞춤하는 이도 있었다. 크릴 맛은 어떨까. 회로 먹으면 고소하면서도 비린내가 약간 나는 편. 초고추장에 크릴 회를 많이 먹은 선원은 설사했다는 후문이다. 단백질 함유가 많아서다.
박 전 국장은 11일 "초대형 태풍을 피해 갑작스럽게 철수하는 바람에 단체기념 사진을 더운 인도양에서 방한복을 입고 찍을 정도로 우왕좌왕하고 힘들었지만, 남빙양 크릴 시험조업 성공은 한국 수산업에 있어 1966년 북양 개척에 이어 한 획을 그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 남빙양 진출 약사 |
1977년 |
1월 18일 |
국제신문 1면 '남극새우를 잡아라' 기사 보도 |
1월 20일 |
수산청 시험조사선 파견 결정 |
10월 |
정기국회 때 예산 확보(1억5000만 원) |
1978년 |
9월 |
남북수산 '남북호'로 시험선 확정 |
12월 7일 |
허종수 단장·취재진·선원 등 105명 부산항 출발 |
12월 10일 |
바시해협 통과 때 인망기 고장, 대만 고웅항 회항 |
12월 21일 |
고웅항 출항 |
1979년 |
1월 6일 |
호주 근해에서 태풍 만남 |
1월 14일 |
남극 수렴선 통과 |
1월 16일 |
월크스랜드 도착, 크릴 800㎏ 첫 어획 |
1월 20일 |
앤더비 어장 도착 뒤 17일간 조업(크릴 총 510t 어획, 총항해거리 3만2889마일) |
2월 10일 |
남빙양 출발 |
3월 7일 |
부산항 귀항 |
※자료 : 국제신문 1979년 3월 6일 자 '남극 어업시대의 개막'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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