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강서구 녹산산단에서 기계부품을 생산하는 A업체 사장은 납품단가를 인하해달라는 대기업(원청업체)의 요구에 잠을 이룰 수 없다. 불황이 이어지면서 회사운영도 어려운데 혹시나 거래가 끊기거나 거래량을 줄일까 봐 바로 거절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A업체 대표는 "가계약까지 체결해놓고 경기가 좋지 않다면서 단가를 20% 인하하겠다고 했다"며 "결국 인하가격으로 본계약은 체결했지만 손해가 막심하다"고 털어놨다.
엔저(엔화 약세)로 수출이 어렵고 경기불황이 장기화하고 있는 가운데 부품소재산업 중심의 지역기업들이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원청업체의 불공정행위로 겹고통에 신음하고 있다.
13일 부산상의에 따르면 지난달 신발섬유 화학 철강 전기전자 자동차부품 조선기자재 등 지역기업 222곳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조사업체의 28.8%가 원청업체의 발주 물량이 불안정해 고통을 받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납품단가 인하 요구(25.7%)' '납품대금 결제일 장기화(12.2%)'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기업도 많아 하청기업에 대한 불합리한 거래관행이 개선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조사업체의 3분의 2에 달하는 66.6%가 원청업체와 거래할 때 크고 작은 불공정행위로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정부가 출범 때부터 대기업의 불공정행위를 뿌리뽑겠다고 공언했지만 불공정 및 부당거래가 끊이지 않고 있는 셈이다.
상당수 지역기업들은 기존 납품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갑을관계'의 고통을 참을 수밖에 없다. 원청업체 측은 경기가 좋지 않아 발주 물량을 취소하거나 줄일 수밖에 없다고 통보하면 그만이다. 대기업이 한 품목에 대해 여러 중소기업과 거래하다 보니 불만을 표시했다가는 거래가 끊어지기 일쑤다. 실제로 STX조선해양과 거래했던 B업체는 물품대금 지급을 연기하겠다는 요구를 거절했다가 아예 거래가 끊어져버렸다.
원청업체들이 납품대금을 제때 주지 않고 3, 4개월짜리 어음으로 결제하는 사례도 많다. 경기가 어렵다며 결제일을 미루는 경우 하청업체가 심각한 자금난을 겪게 된다. 지사과학단지에 입주한 한 중소기업인은 "어음결제 대신 현금으로 결제해주는 기업이 늘고 있지만 단가를 깎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기존 거래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참을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했다.
한편 이날 중소기업중앙회에 따르면 중견기업 104개사를 상대로 조사한 결과, 대기업에 납품하는 중견기업 중 납품단가가 인상된 곳은 5개사(5.4%)에 그쳤고 34%가 오히려 인하됐다고 답변했다. 이에 따라 조사대상의 절반 이상(57.3%)은 '대기업의 동반성장 문화가 개선되지 않았다'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