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사 6개월 만에 인권변호사로
- 성희롱 첫 승소 … 참여연대 설립
- 청년수당·도시재생 등 단행
유력한 여권의 대권주자 중 한 명으로 꼽혔던 3선의 박원순 서울시장은 무엇보다 한국 시민운동의 산증인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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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일 서울 중구 서울시청 앞 광장에 마련된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분향소를 찾은 시민이 조문하고 있다. 이곳에는 이날 오후 5시까지 1만6080명이 다녀갔다. 이용우 기자 |
1956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난 그는 1975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뒤 유신체제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투옥돼 1학년도 마치지 못하고 제적됐다. 이후 단국대 사학과를 졸업한 뒤 1980년 22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문재인 대통령(1953년생)과는 사법연수원(12기) 동기다. 대구검찰청 검사로 임용됐으나 사형 집행 장면을 참관하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6개월 만에 사표를 냈고, 인권변호사로서의 길을 걷는다.
1980년 권인숙 성고문 사건과 미국 문화원 사건, 한국민중사 사건, ‘말’지 보도지침 사건 등 굵직한 사건을 맡았고,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성희롱 관련 법정 공방이었던 서울대 우 조교 사건을 맡아 승소, 여성인권을 향상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시민운동에 본격 투신한다. 1994년 시민단체인 참여연대 설립을 주도했고, 이듬해 사무처장으로 활동하면서부터 우리나라 시민운동의 대부로 자리매김한다. 사법개혁운동, 소액주주운동, 예산감시 정보공개운동 등을 통해 시민운동의 저변을 넓혔으며, 특히 2000년 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부정부패 혐의를 받는 정치인 낙선운동을 이끌며 정치권을 뒤흔들었다. 박 시장이 2000년 설립한 ‘아름다운 재단’은 대표 사회적기업으로 꼽힌다. 박 시장은 또 2006년부터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로 일하며 ‘소셜 디자이너’로도 활약했다. 희망제작소는 공공기관에 시민을 위한 정책을 제안하는 ‘싱크탱크’로, 우리나라 최초의 ‘민관협치’ 모델로 주목받았다.
2011년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사퇴하면서 서울시장 후보로 나선 그는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의 양보로 단일화에 성공, 시장에 당선된다. 청년수당, 도시재생, 원전 하나 줄이기, 노동이사제, 토건에서 복지 패러다임으로의 전환 등 수많은 사회혁신정책을 단행했다. 특히 메르스 때 적극적으로 확진자의 동선을 공개하고, 코로나19 때는 재난기본소득을 앞장서 추진해 호평받았다. 그가 숨지기 전날 마지막으로 발표한 서울시의 새 비전은 그린뉴딜이었다. 모든 차량을 친환경 전기수소차로 바꿔 2050년까지 서울을 ‘탄소배출 제로도시’로 만들겠다는 포부였다. 새로운 시민의 희망을 설계했던 박 시장은 임기 700여 일을 앞두고 황망히 퇴장했다. 박 시장의 재산은 마이너스 6억9091만 원이었으며, 재산 중 부동산으로는 고향 땅(논)만 있을 뿐 아파트나 상가, 주택은 없었다. 이승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