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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70년…분단인 통일인 <5> 다시 읽어보는 한 ‘분단인’의 삶

고난 버틴 아흔살 인생, 그의 끝나지 않은 꿈은 ‘당당한 나라’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01-27 19:46:02
  •  |   본지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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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신불산’ 주인공 구연철 옹
- 빨치산 투쟁에 파란만장한 삶
- 일제징용 알리고 美 간섭에 시위
- 평생 노동운동과 평화운동 펼쳐

- 주변국들 남북관계 개선에 제동
- 우리 힘으로 한반도 평화 지켜야

그는 한 권의 ‘책’이었다. 첫 페이지를 읽자마자 빨려 들어가 목을 꺾고 앉은 자리에서 다 읽게 되는 책. 그런 책을 만나게 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처음에는 재미가 있어도 중간부터는 시시하기도 쉽고 중간까지는 읽을 만하다가 마지막에 김이 빠지는 책도 많다. 하지만 그 책은 달랐다. 다시 다른 사람과 함께 읽고 싶은 책, 책장에 꽂아두기보다는 광장에 내놓고 싶은 책이었다.

내가 좋아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 책을 좋아하지는 않을 거다. 오히려 싫어하는 사람이 더 많을 수도 있다. 유행이 지났거나 관심 없다는 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표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이 책은 어떨까. ‘사람책’인 선생의 피부는 곱고 눈은 맑았지만, 키는 작았고 세련되거나 여유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목소리가 청량했다. 아흔 나이인데도 산에서 듣는 새소리 같았다. 눈과 짝이 맞는 목소리였다. 불을 끄고 휴대폰에 녹음한 선생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그가 필요 없는 것, 진심이 아닌 것, 대충 타협하는 것들을 얼마나 경계했는지 알 수 있다.
   
울산 울주군 일원에 솟아 있는 신불산 전경. 한국전쟁기 상흔이 새겨진 장소 가운데 하나이다. 산지니 출판사 제공
■ 혼돈의 시대, 고된 삶

그의 생애는 안재성 소설가가 쓴 책으로도 나와 있다. ‘빨치산 구연철 생애사’. 노란 표지에 ‘신불산’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나는 그를 만난 후 이 책을 읽었고 이 책을 읽고 난 후 다시 사람책인 그를 만났고 또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은 많은 사람이 기금을 모아 출판한 책이라고 하니, 사람책이었던 그를 책으로 보존해두고 싶었던 마음이 이미 많았던 것이다.

양산 하북에서 태어난 그는 아홉 살 때 군함도의 탄광노동자였던 아버지를 따라 이주한다. 해방이 되자 고향으로 돌아온 소년은 양산의 보광중학교를 거쳐 서울 대신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 인쇄소에 취직하고 노조에 가입하는데, 그 당시 인쇄소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핵심 노조였다. 조합원과 같이 사회주의 이론 공부를 하고 거리에 나가 유인물을 뿌렸다. 모스크바 3상 회의를 두고 찬탁과 반탁으로 갈라진 갈등의 시기, 선생은 거리를 가득 메운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 시위자 중 한 명이었다. 식민지 시절의 친일세력이 미군정에서 다시 자리를 잡는 모습이 스무 살 청년의 마음을 분노로 달구었을 것이다.

제주 4·3 항쟁, 여수순천사건 등 반대 세력에 이승만 정권의 탄압은 극심해졌다. 김구 선생 암살 이후에는 전평소속 노조도 탄압을 받았는데 선생도 노조원 6명과 서북청년단에 끌려갔다. 일본군이 쓰던 막사 건물에 한 명씩 집어넣고 몇 명이 몽둥이로 때리고 고문했다. 경찰도 군인도 아닌, 우익청년단이었다. 물불 가리지 않고 폭력을 행사하는 그들에게 맞아 비명을 지르고 멍이 들고 거짓자백을 한 것이 분하고 치욕스러웠을 것이다. 서북청년단에 대한 분노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분노로 이어졌다. 폭력과 고문이 선생의 의지를 더 강하게 단련시킨 것이다.

유치장에서 나온 후 직장을 잃게 된 그는 대학(동국대학교)에 진학했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입학은 했지만 예비검속이 심해 불안했던 상황. 선생은 피신해 있던 고향(양산 하북)에서 전쟁 소식을 들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친구 한 명과 신불산을 찾는다. 그곳에는 탄압을 피해 산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유격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심사를 거쳐 조선노동당에 입당하고 경남도당 제4지구당에서 조직과 선전 대민공작을 담당했다. 조직만 있었을 뿐 전투력은 거의 없었는데, 인민군 중장 남도부가 이끄는 동해남부유격대가 합세하면서 달라졌다. 갈산고지에 본부를 두고 부산과 경남 동부지역을 교란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났을 때는 30명도 안 되는 패잔병만 남았다. 그는 자신이 이끈 제3소지구당 12명 중 유일한 생존자이기도 했다. 4번의 혹독한 겨울과 토벌, 동지들의 숱한 죽음을 지켜본 24살 청년은 하산 후 부산시당을 재건하려 했으나 경남도경 앞 사진관에서 찍어둔 사진을 찾다가 체포된다. 1심은 사형, 4·19혁명 후 20년으로 감형되었다고 했다.

인터뷰 내내 꼿꼿하던 선생의 목소리가 한순간 높아졌다. 감옥에 있을 때 교도소장이 불렀다고 했다, 전향서에 서명하면 부친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3일간 휴가를 주겠다는 것이다. 비인륜적인 공작이었다. 그는 당신도 인간이냐, 인간이라면 인간다운 말을 좀 하라고 전향서를 던지며 일어났다. 7·4 남북 공동성명 뒤 대우가 달라졌다고 했다. 운동 시간을 지키고 존댓말도 쓰고 곧 석방될 거라는 말도 들렸지만 잠깐이었다. 곧 전향을 거부하는 사상범들을 0.75평 감방에 5명씩 집어넣었다. 두 팔을 벌릴 수도 없는 공간이었으니 모두 앉을 수도 없었다고 했다. 생사를 같이한 동지들의 몸이 고문의 도구가 된 것이다.

■ 예속 벗어난 조국서 사는 것이 꿈

   
일본에서 강연하는 구연철 옹.
김하기의 소설 ‘살아있는 무덤’은 비전향 장기수의 옥중생활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한 명씩 빈방으로 끌고 가 ‘옹이가 박힌 소나무 막대기로 후려친 후 온갖 고문이 이어졌다. 고문에 못 이겨 죽으면 시체의 지문을 날인하여 전향자로 처리하기 때문에 전향하지 않으려면 살아야 했고 살아있으면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고문한 사람들이 가석방을 조건으로 한 강도 강간범들이었다고 하니, 야만에 야만을 더한 폭력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아무도 면회하러 오지 않는 감방에서 24살 청년은 34, 44살의 장년이 된다. 출소 이후 삶은 어땠을까. 세상은 많이 달라졌고 사회의 시선은 싸늘했을 것이다. 겨우 초등학교를 나온 동생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도, 그들을 도와줄 수도 없는 형편 아니었을까.

정지아의 소설 ‘행복’에는 딸 사위와 함께 여행을 가는 빨치산 부부가 나온다. 아내는 전남도당 소속, 남편은 남부군이었다. 한때는 억압과 착취가 없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목숨을 걸고 전장을 누비던 혁명가였지만 지금은 가난하고 볼품없는 늙은네일뿐이다. 풍경도 음식도 즐기지 못하는 부모를 본 딸은 오래전부터 가슴 속에서 근질거리던 것을 묻는다. 후회하지 않냐고.

어머니는 딸을 쏘아본 후, ‘우리가 원제 댓가를 바라고 싸웠간디? 크든 작든 대접받아도 된다는 생각부텀 잘못이여. 우리가 옛날 역사를 지대로 알리는 것도 통일 운동이요. 혁명가답게 넘한테 신세 안 지고 똑바로 사는 것도 통일운동’이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선생도 어디에선가 했을 것 같은 말이었다.

그는 모든 폭력을 이겨내고 돌아왔다.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고문으로 활동하며 노동운동과 평화운동에 몸을 아끼지 않는다. 일제의 강제징용 실상을 알리러 다니기도 하고 우리 주권에 간섭하는 미국에 대한 반대시위도 한다. 나라를 잃었던 고통이 분단체제로 옮겨온 것이다. 이념조차도 자본의 가치로 평가하는 이 시대, 선생은 자본으로 포장된 분단체제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한다. 이미 탈분단적 주체이며, 그의 사상에 동조를 하든 안 하든 그런 주체를 길러내는 나무인 것이다.

   
인터뷰 말미에 아흔의 삶 중 언제가 가장 행복했냐고 물었다. 행복한 적은 없었지만 소원은 있다고 했다. 예속에서 벗어난 조국에 사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남북관계는 미국의 승낙을 받지 않으면 할 수 있는 게 없어, 선생의 한숨 소리를 처음으로 들은 것 같았다. 이 인터뷰를 한 며칠 뒤 북한 개별관광에 대한 대통령의 신년사가 있었다. 이틀 후 미국 대사는 남북관계는 미국과의 협의가 우선이라고 제동을 걸었다. 방위비 인상, 호르무즈 파병, 감만동 미8군의 생화학무기 실험 등 미국의 요구와 횡포가 이어진다. 우리가 분단체제 밖을 사유해야 하는 이유, 선생의 책을 다시 읽어볼 이유이기도 하다. 정영선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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