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성묵 목사 투쟁 정신적 지주
- 노무현, 실무 책임자 맡아 활동
- 문재인, 법조계 등 모금 앞장
- 송기인 신부 대신한 박성원 신부
- 부산가톨릭센터 농성 이끌어
- 대학생·노동자 등 도움도 큰 힘
1987년 6월 항쟁은 부산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번져 나갔다. 부산의 6월 항쟁을 이끈 구심점은 '호헌반대 민주헌법쟁취 범국민운동 부산본부'(부산국본)였다. 당시 부산국본에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부민협)를 중심으로 종교계와 재야 세력, 야당 정치인, 대학생, 노동자 등이 민주주의 쟁취라는 굳건한 결속 아래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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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국본 관계자들이 1987년 6월 27일 부산 동구 범일성당에서 '최루탄 추방의 날' 시위 때 숨진 이태춘 씨 장례미사를 마친 뒤 거리 행진을 하고 있다. 앞줄에 영정을 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왼쪽) 전 대표와 최성묵(오른쪽) 목사가 시위대를 이끌고 있다. 6월 항쟁 사진자료집 발췌 |
당시 부민협 회장을 맡으며 재야에서 활동하던 최성묵(작고) 목사는 부산국본의 상임대표를 맡아 항쟁을 이끌었다. 최 목사는 6월 항쟁 기간 수차례 가택 연금을 당하면서도 직접 가두시위에 앞장서는 한편 부산국본의 회의에도 참석했다. 단순히 부산국본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을 넘어 실제로 투쟁에도 앞장섰다.
최 목사가 부산국본의 정신적 지주였다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부산국본을 대표하는 활동가이자 브레인이었다. 부림사건을 계기로 인권변호사의 길로 접어든 노 전 대통령은 부민협 활동을 하며 자연스럽게 부산국본에 합류했다. 그는 부산국본의 본체라 할 수 있던 상임집행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실무진인 사무국과 투쟁 방향을 논의하고 가두 투쟁에 나섰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변호사 사무실을 문재인(더불어민주당 전 대표) 변호사에게 맡기고 투쟁에 온몸을 던졌다. 부산국본 사무국장을 맡았던 고호석 씨는 "노 전 대통령은 젊은 실무진인 사무국과 매일 의논하고 현장 이야기를 상임집행위원회에 전달했다. 노 전 대통령과 문 전 대표가 실무진과 상임집행위의 가교 역할을 하면서 부산국본은 투쟁 기간 잡음 하나 없는, 전국에서 가장 모범적인 국본이었다"고 말했다.
시민들의 성금이 쇄도했지만 부산국본은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때 노 전 대통령과 문 전 대표는 법조계 등 각계의 모금을 이끌어내면서 재정적으로도 크게 이바지했다.
천주교 부산교구의 박성원 신부는 부산의 6월 항쟁 당시 상당한 역할을 했지만 상대적으로 가려져 있는 인물이다. 6월 항쟁이 일어났던 1987년 송기인 신부는 신군부의 외압으로 해외로 쫓겨나간 상황이었다. 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이던 박 신부는 송 신부의 빈자리를 대신하면서 6월 항쟁의 변곡점이 된 부산가톨릭센터 농성을 이끌었다.
명동성당 농성이 6월 15일 이렇다 할 성과 없이 끝나버리자 전국의 시위도 주춤했다. 더욱이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는 명동성당 농성 해산과 함께 '6월 항쟁은 끝났다'고 선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부산에서는 투쟁 열기를 이어갈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었다. 6월 16일 부산 중구 광복동과 보수동 일대에 집결한 대학생과 시민, 노동자들은 전경 진압에 쫓겨 대청동 부산가톨릭센터 앞까지 밀려났다. 이때 박 신부는 가톨릭센터 문을 열었다. 꺼져가던 항쟁의 불씨를 살린 부산가톨릭센터 농성은 16일부터 22일까지 지속됐다. 350여 명의 학생과 시민, 노동자들이 가톨릭센터에서 농성을 이어갔다.
6월 17일 열린 내외신 기자회견에는 AP, AFP, 로이터, 뉴욕타임스 등 해외의 유수 언론과 국내 언론이 총집결할 만큼 큰 관심을 끌었다. 가톨릭센터 농성이 없었다면 6월 항쟁의 분수령이 된 6월 18일 '최루탄 추방의 날' 시위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평가다.
강은교 시인의 남편인 임정남 씨도 박 신부처럼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은 6월 항쟁의 숨은 주역이다. 작가인 임 씨는 부산국본의 6월 항쟁 과정에서 각종 성명을 도맡아 작성했다. 또 부산가톨릭센터 농성이 이뤄지도록 박 신부에게 센터의 문을 열어줄 것을 조언했다.
6월 항쟁은 부산국본을 중심으로 진행됐지만, 가장 큰 주역은 이름 없는 시민과 대학생, 노동자 등 서민이었다. 이들은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생업까지 접고 매일같이 거리로 나서 최루가스를 뒤집어쓰면서 새벽까지 투쟁했다. 부산대와 동아대를 비롯해 매일 5000여 명에서 많게는 1만 명의 대학생이 광복동과 보수동 서면 일대에서 개헌과 독재 타도를 외쳤고, 시민과 노동자도 합류해 거대한 민주주의의 물결을 만들었다. 신군부는 시대의 거대한 흐름 앞에서 결국 무릎을 꿇었다.
윤정길 기자 yjkes@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