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의선 철로가 지난달 11일 마침내 휴전선을 뚫고 왕래하기 시작했다. 1951년 한국전쟁으로 끊긴 지 56년만이다. 남북을 잇는 이 열차의 불빛이 도약하는 한반도를 밝게 비춰주고 있다.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3조에 나와 있는 영토 규정이다. 하지만 이것은 헌법상의 규정일 뿐이다. 제2차 세계대전후 한반도는 해방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분단의 아픔을 겪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전형적인 반도국가이면서도 지난 60여 년간 대륙으로 가는 육로가 막혀 섬으로 고립된 국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의 해체로 시작된 세계의 신조류는 다시금 한반도에 기회를 주고 있다. 냉전체제가 무너진 자리에 '국경없는 경제전쟁'이란 새 용어가 자리잡았다. 북한마저 핵개발을 지렛대로 변화의 흐름에 편승하는 형국이다. 지구상의 마지막 냉전지대라던 한반도마저 대화와 교류의 시대에 접어든 것이다.

남과 북이 서로 협력하는 시대의 도래는 한반도에 새 패러다임으로 다가온다. 개성공단이 생기고 경의선이 연결됐다. 육로로 북한은 물론 중국 러시아 심지어 유럽까지 갈 수 있는 시대가 눈앞에 다가왔다. 대한민국은 이제 더 이상 섬이 아니다. 60년 만에 반도국가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반도국가로의 복귀. 이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이다. 영토를 둘러싼 국가간 전쟁의 시대는 지나갔다. 새 시대의 무기는 정보 문화 기술 환경 등으로 다변화하고 있다. 반도국 대한민국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대표적인 반도국가인 이탈리아를 벤치마킹해 보자. 이탈리아는 15~17세기 당시 세계의 중심이랄 수 있는 유럽에서 경제력을 틀어쥔 부국이었다. 베네치아 피렌체 나폴리 등 도시국가들은 지중해 연안의 무역을 석권하면서 부를 축적했다. 막강한 경제력은 뛰어난 두뇌 집단의 유인요소가 되었다. 당연히 이탈리아는 경제 문화 상업의 중심지로 발돋움했고, 그 동력으로 르네상스를 일궈냈다.

당시 이탈리아가 이처럼 번성한 것은 반도국가의 특성을 최대한 활용한 결과였다.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적하고, 대륙쪽에서 인재를 끌어들여 건축 미술 과학 등 문화를 발전시켰다.

한반도도 다르지 않다. 통일신라시대 장보고가 해상을 장악했을 때 우리나라는 동북아 무역의 중심지였다. 고려시대에는 강대국이었던 송과 거란의 틈바구니에서 등거리 외교로 입지를 구축했다. 당시 서희 장군은 국제관계를 정확히 꿰뚫어보고 거란의 침입을 막은 것은 물론 강동6주라는 실리를 챙길 수 있었다. 이들 사례는 반도국가의 특성을 살려 국제관계를 충분히 활용한다면 소국이지만 강한 나라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탈리아를 한번 더 들여다 보자. 르네상스 이후 프랑스 영국 등 주변국들이 중앙집권체제를 갖추면서 부국강병의 길에 들어서는 즈음 이탈리아는 여전히 도시국가의 틀을 벗지 못했다. 시대의 조류를 타지 못한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3류국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뛰어난 혜안을 가진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통해 강력한 통치력을 가진 지도자가 출현해 이탈리아를 통일해 주기를 열망했으나 이뤄지지 못했다.

한반도는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세계 초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 싸여 있다. 여기에 남북이 화해 협력의 시대로 가는 현실은 한반도에 새로운 선택의 기회를 주고 있다. 고려시대 이후 수백년 만에 찾아온 호기이다. 이제 모든 조건은 갖춰졌다. 세계사의 흐름이 한반도에 유리한 환경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한국해양대 동아시아학과 김태만 교수는 "남북 간 화해 협력으로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가 평화무드로 가고 있다"면서 "남북 공조를 바탕으로 주변국들과 효율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해 나간다면 한반도는 동아시아의 중심으로 거듭나는 기회를 맞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구한말의 실패' 미래 여는 열쇠로
■ 서유견문과 조선책략
지난 19세기 근대화 시기와 지금(21세기)이 비슷한 형세라고 한다. 두 시기가 문명사적 전환기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세력다툼이 벌어지고 있는 점도 닮았다. 당시는 개화기를 맞아 서구문명에의 도전이 과제였다면, 지금은 네트워크시대에 걸맞은 소프트파워를 구축하는 것이 숙제다. 그때는 실패했다. 왜 그랬을까.

다양한 분석이 있을 수 있지만, 당시 우리 지도자들이 문명의 흐름과 세계질서의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점을 주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서구문명을 무조건 배척한 위정척사파, 기술문명은 받아들여야 한다는 동도서기파, 서구문명을 맹목적으로 취하려 한 문명개화파 등으로 갈려 혼란상이 이어졌다. 지도층에선 중국모델이냐 일본모델이냐를 놓고 권력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정권유지를 위해 외세에 의존하다 마침내 일본의 속국으로 전락했다.

이런 혼란상은 1880년 일본주재 청국 외교관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둘러싼 논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이 책자에서 러시아의 남하를 방지하기 위해 친(親)중국, 결(結)일본, 연(聯)미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이 조선책략을 내놓은 것은 한반도에서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일본과 미국을 끌어들여 러시아를 견제하겠다는 이이제이의 발상이었다. 하지만 우리 지도자들은 당시 국제정세를 정확히 읽지 못해 혼란에 빠졌다. 일본과의 협력을 중시한 미국은 일본을 지원했고, 일본은 청·일 러·일 전쟁을 통해 한반도에 독점적 영향력을 확보하게 된다. 당시 지도자들이 국제관계를 제대로 읽고 외교역량을 십분발휘하면서 내부 역량을 키워왔다면 어땠을까.

그런 측면에서 유길준의 '서유견문'(1895년 간)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책에서 "개화란 천사만물이 지극히 선하고 아름다운 경지에 이르는 것인데 현재 그러한 경지에 이른 나라는 없으며 단지 현 시점에서 서구가 앞서 있을 뿐이다. 누구든 노력하면 개화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라고 썼다. 그는 또 위정척사파와 문명개화파를 모두 비판하고 시세와 자신의 처지를 감안해 속도를 조절하면서 타인의 장점을 취하는 자를 '개화의 주인'이라고 했다.

'역사는 미래의 거울'이라고 한다. 서유견문이 일찍 발간됐다면 그리고 열강들 틈바구니에서 슬기롭게 헤쳐나갈 지도자가 있었다면 역사는 바뀌었을까. 분명한 것은 당시의 어리석음을 오늘날 되풀이해선 안된다는 점이다. 그런 측면에서 역사는 반면교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