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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그의 길 위에서 생각한다 <5> 외교의 場, 누리마루 APEC 하우스

“한 생각에 얽매이지 마시오” 그림자가 되겠단 무영을 치원은 거절했다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03-01 19:28:51
  •  |   본지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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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구가 대마도 발판 삼아 침입해
- 해운포서 살육·노략질 일삼지만
- 방어 약해 속수무책인 경우 허다

- 군사 지원해 안정 찾아야 함에도
- 불안정한 왕실이 강성하지 못해
- 왜국과 직접 교섭할 여건 안되니
- 안타까운 마음에 한숨만 내쉬어

- 만호의 딸 ‘무영’ 검술에 능하여
- 나라의 기둥 따르고 싶다는 말에
- 바다 같이 넓게 생각하라 일렀다

   
고운 최치원이 군사에 앞서 먼저 외교를 생각한 해운대 동백섬에 누리마루APEC하우스가 들어선 것은 참으로 인연이다. 이곳은 2005년 11월 제13차 APEC 정상회담의 메인 회의장이었다. 국제신문DB
■군사에 앞서 외교로 적 다스려야

‘바라보니 깃발들이 문득 펄럭이네 / 변방을 가로지르는 군대인가 했네 / 사나운 불꽃 하늘을 살라 지는 해 무색하게 하고 / 미친 연기들을 막아 지나는 구름을 끊네 / 마소(馬牛) 치는 데 방해된다 탓하지 마오 / 여우 살쾡이 죄다 흩어지니 기쁘지 아니하오 / 다만 두려운 건 바람이 산 위까지 불어 / 옥석(玉石) 가리지 않고 모두 태울까 하는 것이라네.’

전장(戰場)으로 향하는 군사의 행렬을 보고 지은 시 ‘야소(野燒, 들불)’이다. 그렇다. 도둑과 적을 물리치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만 그 불길과 화살에 무관한 백성에게까지 미쳐 삶의 터전을 폐허로 만들고 가족을 허물기도 하니 무력에 앞서 설득과 외교의 방책을 찾는 것이 옳은 길이다.

   
“내가 적장에게 격문을 보낸 것에는 그런 뜻도 있었습니다. 비록 그에게 항복을 얻어내지는 못하였으나 도리를 밝혀 양심을 건드리니 주저하게 하고, 군사의 현실을 밝혀 위협하니 두려움을 품어 전의를 떨어뜨리게 했습니다. 결국 황소는 패퇴하였고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글로써 전쟁의 폐해를 절반은 줄인 셈이지요.”

치원의 말에 만호는 고개를 저었다. “위협이 되려면 우리 군세가 강해야할 텐데 봉화가 아무리 빨리 전파해도 여기저기 나눠져 있는 군사들이 도달하려면 시간이 제법 걸립니다. 그런데 도적들은 많은 수로 일시에 쳐들어와 살육과 노략질을 일삼고, 우리 군세가 갖춰질 만하면 재빨리 도망쳐버리니 속수무책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치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나라 역시 감히 왜구 따위가 넘볼 수 없는 군세임에도 막상 침범이 있으면 작은 진영의 군사로는 감당하지 못해 패하고, 백성의 피해에 분통만 터뜨리는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물끄러미 바다 건너의 섬을 바라보던 치원이 묻는다. “대마도의 도주는 어떤 자입니까?”

   
부산항을 떠나는 미 항모 조지 워싱턴호(9만7000t급) 뒤로 대마도가 선명하게 보인다.
■왜구의 항로를 끊으려면 대마도에 군사를

“저 섬은 왜국보다 우리 땅과 가깝고, 본디 왜국 사람이 아님에도 왜말을 쓰고 그 풍습을 따라하는 것이 오래입니다. 아마 이전 우리 삼한 사람들이 바다에 익숙지 않아 소홀한 때문이겠지요. 더구나 왜국은 섬나라로서 육지와의 교역이 절실하니 우리를 찾아오는 노정에 대마도를 발판으로 삼으면서 억압이 점점 더해진 것인데, 섬의 도주는 제법 현명한 사람으로 언제나 우리와의 교류를 원합니다.”

“부족한 것이 주로 양곡이라면 우리가 그것으로 달래며 왜구에게 포구를 열지 않거나 그 동정을 미리 알려주도록 하는 길은 없겠습니까?”

“저들의 마음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왜의 처지에서는 대마도를 발판으로 삼지 못하면 해로가 길어져 어려움을 겪게 되니 죽기 살기로 사나워집니다. 그걸 막으려면 군사를 지원해야 하니, 아예 우리 땅으로 삼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그리 다스리면 근원부터 제거되는 것인데 나라의 뜻이 어떤지….” 힐끔 치원의 눈치를 살피는 만호의 낯빛에 불만과 간절함이 겹쳤다.

그 마음 모르지 않는다. 왜구의 만행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으니 심지어 왕경 인근에까지 직접 미치기도 했다. 하여, 신라 22대 지증왕(재위 500~514년)조에 장군 이사부로 하여금 왜구의 발판이 되고 있던 울릉도를 점령하여 복속시키니 비로소 안정을 얻을 수 있었다. 만호의 말대로 대마도를 점령하고 군사를 파견하여 지키며 도주로 하여금 섬 백성을 관리하게 한다면 항구적인 안정을 도모할 수 있을 일이다. 그러려면 왜국과의 교섭이 필요할 테니, 그 사절은 치원 자신이 나설 수 있지만 왜를 위무할 무엇을 줄 것인지가 관건이었다.

하지만 지금 나라 사정으로는 그만한 대사를 거론할 여건이 아니니 어서 왕실과 조정이 안정을 찾아 강성해져야 하지만 아무래도 쉽지 않을 듯싶었다. 치원은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며 앉았던 바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갈매기처럼 매이지 않은 자유

   
고운 최치원이 무영의 붉은 댕기에 써준 경구 ‘자유외경(自由外境)’.
내일이면 왕경으로 출발하니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아쉬움에 사방을 둘러보는 치원의 눈길이 만호 뒤에 서 있는 딸에게 닿았다.

“고운 자태이신데 항상 남장입니다.” 그간의 배려에 대한 고마움의 인사였는데 여인은 서슴없이 치원의 앞으로 걸어와 한쪽 무릎을 꿇는다.

“무영입니다.” 여인의 이름치고는 특별하다 생각하는데 만호가 웃음을 지으며 나섰다.

“여덟 살 때 어미를 잃었습니다. 제가 왜구에 맞서려 달려 나간 뒤 다른 놈이 집안에 들어와 안해(아내)를 베는 것을 두 눈으로 본 게지요. 그때부터 검을 잡겠다고 해 말리지 않았는데 제 뼈를 받아서인지 이제는 어지간한 사내 서넛은 너끈할 정도입니다. 본래의 이름을 버리고 ‘없을 무(無)’에 ‘그림자 영(影)’으로 새 이름을 지어준 것은 그 길에서 살아내려면 그림자를 보이지 않도록 빠르라는 뜻입니다, 허허.”

치원이 애처로운 눈길로 고개를 끄덕이니 무영은 고개를 숙인다. “감히 선생님을 모시고 싶습니다.”

그 당돌함에 치원은 당황해 만호를 돌아보는데 그는 사뭇 엄숙한 낯빛이다. “혼인에는 뜻이 없다 하더니 선생을 따르겠다는 뜻이 워낙 확고해 말릴 수 없었습니다. 바닷가 천한 백성으로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인 줄은 아니 너무 노여워 마십시오.”

치원은 손사래부터 친다.

“천하다는 말씀은 당치 않습니다. 다만 저는 이미 혼인한 몸이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영은 다시 고개를 숙인다. “여인으로 모시지 못한다면 그림자로 모시겠습니다. 검을 들어 사람을 지키고 우리 땅을 수호하는 울타리의 나뭇가지 하나가 되고자 뜻을 세웠습니다. 나라의 기둥이 되는 분의 곁이라면 여인이면서 온전한 사람으로 뜻을 이룰 수 있겠습니다.” 당찬 어조에 굳은 의지가 가득 서려있다. 치원은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다.

“그 뜻은 참으로 높고 귀합니다. 하지만 이전 화랑의 시작이었던 원화도 사랑하고 가정을 일궜으니, 그것은 자연의 이치이고 효(孝)의 완성입니다. 충(忠)과 효는 한 뿌리이고, 아직 이른 나이이니 생각을 돌과 같이 하지 말고 저 바다와 같이 하길 바라오.”

치원의 완곡한 뜻에 잠시 생각하던 무영이 고개를 들었다. “저의 어림을 지적하시니 염두에 두겠습니다. 다만 제 생각의 경구(警句)로 삼을 글이라도 남겨주시면 실마리로 삼을까 합니다.”

문득 눈앞으로 갈매기가 지나가니 치원은 붓을 꺼낸다. 무영은 머리끝을 묶었던 동백꽃인양 붉은 댕기를 풀어 펼치고, 치원은 ‘자유외경 고운(自由外境 孤雲)’이라 쓴다. 언젠가 바다갈매기를 보고 지었던 ‘해구(海鷗)’라는 시의 구절 ‘출몰자유진외경(出沒自由塵外境)’을 줄인 것으로 ‘매이지 말고 자유로워라’는 뜻이었다. - 해운대 이야기는 최치원의 유랑 길에서 다시 이어진다.

김정현·소설가

일러스트 = 백정록 / 제자(題字) = 이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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