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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에세이] 코뿔소 없음과 진공

김광석 부산대 광메카트로닉스공학과 교수·‘감성물리’ 저자

  • 김광석 부산대 광메카트로닉스공학과 교수·‘감성물리’ 저자
  •  |   입력 : 2026-11-02 19:26:41
  •  |   본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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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가을 무렵, 수리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교수는 자신의 방까지 찾아와 의견을 굽히지 않는 오스트리아 유학생에게 방에 코뿔소가 없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 있냐고 물으며 책상 밑을 살피는 시늉까지 했다. ‘1+1=2’를 증명하기 위해 방대한 분량의 논리 기호와 명제를 구축한 러셀 교수보다 더 이상해 보이는 스물두 살 남학생 이름은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코뿔소 없음’ 일화와 유사한 ‘부재’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오래전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파르메니데스는 없는 존재에 대해서는 생각과 말조차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바꿔 표현하면, 생각하고 말할 수 있다면 그들은 모두 존재한다. 하지만 있지 않은 일을 지어낸 거짓말이라는 존재를 마주하는 순간 모순이 발생한다. 플라톤은 이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절대적 비존재와 구분되는 상대적 비존재를 ‘다름’의 방식으로 해석했다. 즉, 부정의 수학 명제처럼, ‘코뿔소 없음’은 비존재가 아니라 ‘코뿔소 있음’과 구분되는 또 다른 존재가 된다. 비록 방 안에 코뿔소는 없지만 공간을 구성하는 벽, 바닥, 천장, 그리고 공간을 채운 공기라는 다른 물질이 존재한다.

하지만 사무실 안 코뿔소나 하마처럼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사태도 모두 존재로 취급해야 할까? 러셀은 이렇게 실재하지 않는 것들을 무작정 존재로 받아들이기보다 명제의 논리적 분석으로 존재의 수를 최소화하는 방식을 택했다. 반면, 원자가 물질을 구성하듯 논리의 원자로 구축된 명제를 실재적 세상과 연결하고 싶었기에 경험을 특히 중요하게 여겼다. 따라서, ‘러셀’에게 ‘코뿔소 없음’은 ‘코뿔소 있음’의 부정 명제이면서 동시에 경험 세계의 사실적 기반이 된다.

하지만 ‘코뿔소 없음’은 코뿔소 단어만 언급할 뿐 정작 ‘없음’만의 고유성을 말하지 않는다. 그림판 앱을 사용하듯 코뿔소가 아닌 것들로 채워진 사무실 안 가구 벽 바닥 천장 배경까지 모두 다 제거해 보자. 텅 빈 공간에 대응되는 대상이 실재 세계에 있을까? 이번에는 ‘코뿔소’라는 단어를 ‘분자’로 대체한 후 진공펌프로 제거해 보자. 빈 방에는 한 톨의 분자도 없을까? 최첨단 진공 기술을 사용해도 1㎤ 공간에는 수백 개의 분자가 잔류할 수 있으며 인간의 시각 경험이 분자의 완벽한 부재를 담보할 수도 없다. 결국, 방 안의 분자가 제거되어 가는 과정을 이야기할 수는 있지만 모든 분자가 제거된 사태가 현실 세상에 존립할지는 알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에게도 ‘코뿔소 없음’에 대응되는 그림은 현실 세상에 없었다.

고대 중세 근대를 거치는 동안에도 공간은 4원소, 에테르, 에너지로 채워진 연속체로 여겨졌다. 따라서 원자와 함께 원자를 제외한 빈 공간을 실재적 존재로 간주한 데모크리토스, 행성 사이의 힘을 매개하는 소용돌이치는 에테르를 제거한 뒤 텅 빈 절대공간을 설정한 뉴턴, 에너지 연속체 개념 대신 허공 속을 떠도는 파편적 원자들의 통계적 운동을 선택한 볼츠만의 사례들처럼, 성공적 과학 이론이 가정한 빈 공간도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모두 논리 구조상 문제를 지닌다. 그래도 이들의 파격적인 이론 덕분에 물리학이 발전했으니, 빈 공간을 거부했던 이들은 오히려 과학 발전의 걸림돌로 취급받아야 할까? 재미있게도 현대 물리학은 진공을 거부했던 이들의 손을 들어준다.

상대론은 에테르와 절대공간을 에너지에 의해 휘어질 수 있는 ‘상대적 시공간’이라는 물리적 존재로 대체했다. 양자광학은 빛이 없는 어둠의 진공도 에너지를 지닌다고 말한다. ‘디락의 진공 모형’에서는 양의 에너지 수면 위(E>0)로 탄생한 전자가 음의 에너지 바닷속(E<0) 자신의 빈자리와 만나 광자를 만들고 사라진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양자장론에서는 공간 전체를 ‘장(Field)’이라는 새로운 존재로 채운 후 0이 아닌 에너지가 요동치며 가상입자의 생성과 소멸이 반복된다. 결국 현대 물리학의 ‘진공’은 철학적 ‘없음’과 다른 새로운 언어와 존재로 채워진 실재적 대상을 다루는 셈이다. 코뿔소를 지우면, 그 빈자리에 새로운 이름과 모습의 또 다른 코뿔소가 탄생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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