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UN 연설차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던 지난달 26일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사고가 일어났다. 국격에 걸맞지 않은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3주째 접어든 현재 전체 시스템 복구율은 45.7%대에 그치고 있다. 이를 두고 정치적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더구나 화재가 발생한 날 귀국한 이재명 대통령이 이틀 후 28일 JTBC 예능 프로를 촬영한 사실이 밝혀지며 논란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국민의힘은 세월호 사건 때 큰 논란을 일으키며 탄핵으로까지 이어진 ‘잃어버린 7시간’을 언급하며 대통령의 위기 대응 태도를 문제 삼았다.

국가 정보 시스템 마비는 국가적 대형 재난이다. 대통령의 일정, 위기 대응 및 소통 방식 등은 공적 영역이라 정치적 비판 대상이 되는 건 당연하지만, 대통령 부부의 예능 출연을 세월호 참사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잃어버린 7시간’에 빗대 ‘잃어버린 48시간’이라 공격하며 국민적 상처이자 국가적 트라우마를 정쟁 소재로 삼는 건 품격 잃은 비판이란 지적이 있다. 하지만 대통령실이 처음부터 야당의 문제 제기에 방송녹화 사실을 부인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 문제를 키운 측면이 없지 않다.

정치적 입장을 걷어내고 냉정하게 따져보면 세월호 참사 때 박근혜 대통령의 ‘잃어버린 7시간’과 이번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직후 이재명 대통령의 ‘냉장고를 부탁해’ 촬영은 본질적 문제는 아니다. 세월호는 비극적 참사였지만 예외적 사고에 대한 일사불란한 대처 요구는 결과론적 억측에 가까운 측면이 있었다. 그리고 이번 국정자원 화재 진압후 대통령 부부의 방송 출연이 사후 복구에 무슨 큰 방해가 되었겠나. 둘 다 국가 통치자로서 도의적 책임은 있을지언정 국무총리나 해당 부서 장관이 지휘해도 별반 달라질 게 없는 사안들이다.

2019년 초강력 허리케인 ‘도리안’이 미국 남동부를 강타하기 직전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두 차례에 걸쳐 골프를 쳐 부적절한 처신이란 비판이 쏟아졌었다. 당시 국립허리케인센터는 ‘재앙 수준’의 파괴력이라며 최고 등급인 5등급을 매겼고, 긴급 대피령을 내리며 비상사태를 선포했었다. 언론까지 비판 대열에 합류했지만 백악관 대변인이 “대통령은 골프장에서도 관련 상황에 대해 매시간 보고 받았다” 해명하며 논란은 더 이상 확대되지 않았다.

우리와 문화와 정서가 다른 미국적 대응 방식이 더 합리적이란 걸 말하려는 게 아니다. 미국은 대처만 제대로 되면 대통령의 일정을 굳이 따지지 않는 반면 우린 늘 대통령과 책임자의 태도와 진정성, 도덕성을 물고 늘어진다. 태도에 대한 도의적 책임은 피해갈순 없다. 문제는 사태 수습과 예방책은 도외시한 채 도덕적 잣대만 들이대는 ‘도덕 환원주의’다. 세월호 사고 직후 현장에서 사태 해결중이던 서남수 교육부 장관이 컵라면 먹은 게 공분을 사고 사퇴까지 한 일은 지나친 도덕 환원주의의 결과였다.

오랫동안 한국철학을 연구해온 일본 교토대 오구라 기조 교수는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란 저서에서 한국을 ‘도덕 지향성 국가’로 규정했다. 한국인들이 도덕 지향적이란 뜻이 아니라 모든 언동을 도덕적 잣대로만 평가하는 ‘도덕 환원주의’를 말한다. 참사를 일으킨 원인 규명과 시스템 개선은 뒷전이고 그 시간에 대통령은 뭘 했는지, 책임자 색출과 처벌에만 골몰한다. 이 모든 과정의 근저에 도덕 환원주의가 깔려있다. 상대에 대한 도덕적 타격이 지지율과 연결되는 극단적 진영화가 만든 정치 행태 때문이다.

이번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사고는 국가적 대형 참사가 분명하다. 모든 국가 시스템이 디지털로 일체화 되고 있는 디지털 시대에 시스템 마비는 대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 더구나 우리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곧 도래할 AI 시대는 어떤 가공할 위험이 발생할지 예측조차 불가능하다. 어떻게 10대 경제 강국이라 자부하는 나라에서 국민의 모든 생활과 연결된 국가정보자원 유지관리가 이렇게 허술하단 말인가. 우린 대체 304명을 한꺼번에 잃은 세월호 비극을 통해 뭘 배웠고 어떤 변화를 만들어온 것인가.

국가적 긴급 재난 상황에서 대통령의 예능프로 출연은 시의 적설성과 도의적 비판에서 자유로울순 없지만 그건 사실 부차적인 문제다. 우린 11년 전 세월호 참사로 304명을 한꺼번에 잃었고 아직도 트라우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세월호 이후 우린 해마다 크고 작은 참사를 겪고 있고, 예외없이 책임 전가와 정치적 공방을 벌인다. 현 정권은 전 정권에 책임을 떠넘기고, 국민은 정부에만 책임을 묻고 언론은 원인에 대한 심층 분석보다 자극적 요소 보도나 안전불감증을 탓한다. 세월호 극복 과정에서 도덕 환원주의에 빠져 성찰과 반성없이 끝없는 진상규명과 정치적 공방만 벌이며 정작 해야 할 곳곳의 재난 방지와 유지관리 시스템은 뒷전으로 미뤄놓은 결과가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라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