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동구 초량동 일본식 가옥(일맥문화재단)에서 정발 장군 동상과 항일 거리로 향한다. 이곳에는 일제 강제징용 노동자상,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져 있다. 이어 윤흥신 장군 동상. 윤흥신 장군 동상의 바로 옆에는 ‘두모포 왜관 표석’이 있다. ‘고관(古館·옛 왜관)’ 입구에 해당하던 지점이다. 자리를 옮겨 동부경찰서 앞 ‘부산진매축 기념비’로 향한다. 여기서 부산진일신여학교, 부산진교회, 정공단을 거쳐 안용복기념 부산포개항문화관으로 가는 길. 부산포개항문화관 맞은편에서 경사형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는다. 증산공원(증산왜성)으로 오르는 길이다. 증산전망대에 서니 부산항 북항의 조망이 시원하다. 이 코스는 그냥 걷기만 하면 별다른 감흥이 없다. 아는 것 만큼 보인다고 했다. ‘관문의 도시’ 동구에 관한 이야기가 가득한 길이다. 이야기보따리가 계속 펼쳐지는 길이다. 스토리텔링의 힘이다.
기자가 몸담은 ㈔ 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에서 조만간 ‘이야기공작소_부산’ 제1호를 펴낸다. 앞으로도 제2호, 제3호 등이 잇따를 것이다. 이번 창간호의 주제는 ‘문화 허브_러브 동구 ’. 200쪽에 가까운, 두꺼운 책이다. ‘사랑’스러운 동구의 이야기를 듬뿍 담는다. 창간호의 내용은 크게 네 가지. ‘스토리 아카이브: 이미 잊혔거나 여전히 모르는’, ‘스토리 인사이트: 점철된 이야기를 꿰뚫고 지나가다’, ‘스토리 콘테스트: 사는 이야기, 나의 스토리’, ‘부산 이야기_책: 부산에서 책과 함께하는 이들’ 등이다. ‘스토리 아카이브’와 ‘스토리 인사이트’에 참여한 이야기꾼은 모두 네 명. 각각 동구 범일동 수정동 좌천동 초량동에 얽힌 별별 이야기보따리를 선보인다. 굴비 엮듯 주렁주렁…. ‘스토리 콘테스트’에는 동구를 소재로 한 스토리 공모전 수상작들을 싣는다. ‘부산 이야기_책: 부산에서 책과 함께하는 이들’에는 책을 만드는 사람, 책을 쓰는 사람, 책을 나누는 사람, 책을 읽는 사람이 등장한다. 장현정 ㈜호밀밭 대표, 이정임 소설가, 강정아 책과 아이들 대표, 서부국 서평가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야기공작소_부산’ 창간호의 핵심은 ‘스토리 아카이브’와 ‘스토리 인사이트’. 하나같이 재미있는 이야기들이다. 먼저 ‘조방앞’. 작가(조봉권)는 지금의 범일동 자유시장에서 부산시민회관 일대까지 아주 큰 공장이 들어선 이야기를 전한다. 바로 ‘조방(조선방직주식회사)’이다. 1928년 무렵 한국 면 시장의 25%를 점유한 그 조방. 조방은 1968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조방앞 시대는 조방이 사라지면서 제대로 시작된다”는 표현에 눈길이 간다. 나여경 소설가는 두모포 왜관(지금의 수정동 일대)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흥미로운 제안을 한다. 일본 나가사키 데지마에 있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상관(商館)의 예를 들어서…. 데지마에 체류하던 독일인 의사 지볼트와 게이샤 오타키의 사랑 이야기다. 이들의 딸 쿠스모토 이네는 일본 최초의 산부인과 의사가 됐다. 또 손녀 쿠스모토 타가코는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 속 메텔의 모델이 됐다. 이런 스토리텔링을 ‘고관’, 즉 두모포 왜관에도 입혀보자는 것.
김민수 작가는 증산전망대에서 바라보이는 대마도에 관해 이야기한다. 한국인들의 필수 여행코스인 히타카츠항 밸류마트 오우라점. 그 근처에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출병지 오우라항 이야기다. 최원준 시인은 ‘초량의 맛, 초량돼지갈비’로 맛깔나는 음식 이야기를 펼친다. 초량돼지갈비의 유래, 초량육거리에 있던 ‘기사식당골목’이 ‘돼지불백골목’으로 바뀐 사연,‘원조’ 돼지국밥 집이 왜 부산역과 범일동 일대에 많은지 등이다.
스토리텔링이 이젠 식상한 ‘스토리’가 아니냐는 소리도 일각에서 들린다. 하긴 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가 출범한 지도 벌써 10년이 됐다. 강산도 변하는 세월이다. 그럼에도 스토리텔링은 ‘여전히’ 살아 있다. 어떻게 가꾸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면 스토리텔링에 힘이, 근육이 붙는다. 강산이 변해도 굳건할 그 힘과 근육.
스토리텔링의 힘으로,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최참판댁’은 여전히 인기 관광지다. 가짜 ‘최참판댁’인데도…. 대하소설 ‘토지’가 떡 하니 버티는 까닭이다. 이탈리아 서북부 베로나의 ‘줄리엣의 집’(‘로미오의 집’은 개방되지 않는다!)의 벽에는 사랑의 메시지를 담은 붙임쪽지가 빼곡하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 덕분이다. 루마니아 브란 성(城)은 ‘드라큘라가 살았던 성’으로 세계적인 명소가 됐다. 드라큘라는 아일랜드 작가 브램 스토커의 소설 속에만 등장하는 가공의 인물이다. 생수 브랜드 ‘에비앙’이 알프스의 지하수에서 ‘약’으로까지 포장된 것, 담배 ‘말보로’가 남성적 이미지(카우보이, 보안관 등)를 내세운 것 역시 스토리텔링에 힘입었다.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을 되새기는 요즘이다.
오광수 편집국 부국장·걷고싶은부산 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