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살이 끝에 새롭게 두른 나이테를 비집고 올이 풀린 듯 새순 하나가 움트더니, 삭풍을 견디며 잠시 숨을 고르던 생명이 따스한 기운에 한올 한올 풀려나왔다. 그렇게 연녹색 어린잎이 여린 가지로 점점 번져 가는 것을 보며 다시 시작되는 대자연의 순환을 느낀다.

변함없이 계절이 바뀌어 올해도 어김없이 봄이 찾아왔다. 올봄은 영화 ‘봄날은 간다’로부터 시작된 ‘변하는 것’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다. 뛰어난 영상미에 함께 담긴 자연의 소리에 매료돼 몇 차례 다시 본 영화를 얼마 전 우연히 또 보게 됐다. 처음에는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명대사 때문에 ‘사랑이 변할 수 있다’ 혹은 ‘없다’라는 명제의 참과 거짓을 따져보는데 골몰했지만, 몇 차례 ‘다시보기’를 거듭하며 라면과 김치로 비유하고 있는 주인공 남녀의 다른 사랑 방식, 점점 변해가는 둘의 감정을 계절의 변화에 따라 전개하는 짜임새 등을 발견하는 재미에 나의 ‘인생영화’로 자리매김한 명작이다. 이번에는 영화의 끝 무렵이 인상 깊게 남았다. 다시 핀 벚꽃을 배경으로 당당하게 서 있던 남자 주인공은 성숙해져 있었다. 가시지 않은 감정을 누르고 뒤돌아 걷는 모습에서 성숙함이 느껴져, 그에게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자신의 질문에 어떠한 답을 찾았을지 묻고 싶었다.

시간은 세상 모든 걸 변하게 만든다. 시간에 따라 변하는 환경과 조건에 적응하는 것이 성숙이며 바꿔 말해 성숙은 변화하는 환경에 대응하는 능력일 것이다. 원초적 본능으로부터 시작되었더라도 사랑 또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감정과 생각이기에 각자의 입장과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존중하지 않는다면 오랜 시간 지속되기 어렵다.

시간은 예술 또한 변하게 만든다. 예술이 추구하는 절대적 가치야 불변의 진리이지만 가치 추구를 위한 행위와 양식 등은 시간에 따라 변화해 왔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우리가 접하고 있는 전통 음악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지금의 모습 그대로일 것으로 생각하지만, 과거에 창작된 전통 음악 역시 지속적으로 변화하며 오늘에 이르렀고 지금도 변화의 과정에 있다. 용비어천가를 가사로 했던 ‘여민락’은 15세기 전반 세종 때 만들어져 궁중의 행사나 잔치에서 연주됐으며 당시의 선율이 정간보(세종 때 창안된 음의 길이를 표기할 수 있는 악보)의 형태로 세종실록에 담겨 있다. 이후 민간에서 풍류로 즐기며 지금까지 전하고 있는데 최초의 기록인 세종실록 악보의 곡과 지금의 ‘여민락’은 같은 곡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사뭇 다르다. 이러한 양상은 악보로 전해지는 다른 악곡을 통해서도 비교할 수 있는데 음악의 용도와 향유층의 변화, 그리고 이에 따른 악기와 연주 방식 등의 변화에 기인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판소리 또한 시간이 지나며 변화해 왔다. 향유층이 서민에서 양반과 같은 식자 계층으로 확대되며 사설에 한문 고사성어가 늘어나고 음악적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방식도 다양해졌는데 그중 명창의 예술성을 덧입힌 ‘더늠’이 돋보인다. 오랜 시간 수련을 통해 명창의 경지에 이르러 스승으로부터 물려받은 소리에 본인만의 소리를 담는 것을 ‘더늠’이라고 하는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조선 정조 때 이름을 떨친 권삼득 명창의 흥보가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이것을 ‘제’라고도 하며 명창의 이름을 붙여 ‘○○○제’라 하는데 ‘더늠’과 ‘제’는 판소리뿐만 아니라 기악의 한 분야인 산조에도 있다. 산조에서는 연주자의 이름 뒤에 ‘류’를 붙여 ‘○○○류’ 산조라 일컫는다. 이렇듯 전통 음악 또한 끊이지 않고 변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유형의 문화유산처럼 변화를 멈춘 것으로 생각해 안타깝다.

절대적 가치라면야 시간을 초월한 영속성을 지니기에 변화에 적응할 필요도, 그로 인해 성숙해져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도, 사랑도, 예술도 모두 자연과 사회관계 속에서 존재하기에 그 자체로 독립적일 수 없으며 다른 사물과 의존적인 관계에서 시간에 따라 변화해 가기 마련이다. 꽃이 피고 지며 자연에 깃들어 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