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을까요?”
오랜만에 만난 그녀의 불안과 자조 섞인 질문에 나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는 우리 동네에서 엘리트 미술 교육과정을 뛰어난 실력으로 마친 소위 청년 예술가다. 예술중 예술고 예술대 대학원까지 학업 기간만 해도 12년이다. 그동안 뒷바라지한 그녀의 부모님을 존경할 따름이다. 작고 여린 몸으로 본인 키보다 훌쩍 크고 넓은 캔버스를 아무렇지도 않게 감당한다. 팔이 닿지 않는 높은 부분은 떨어진 물감이 말라붙어 덕지덕지 지저분한 빨갛고 파란 플라스틱 의자를 밟고 올라가 붓질을 한다. 여러 번 밟았을 테니 플라스틱 의자가 성할 리가 없다. 곧 부서지지 않을까 싶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는다. 그래도 작업복 위에 두꺼운 앞치마로 나름의 청결을 유지한다고 한다. 우리는 함께 웃었다.
우리에게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이미지들, 예쁜 화구통을 들고 햇볕 잘 들고 산들바람 살랑이는 경치 좋은 곳에서 우아한 이젤을 펼쳐 그 위에 작은 캔버스를 올리고 형형색색 아름다운 색이 있는 팔레트를 들고 스케치를 고민하는 모습, 혹은 베레모와 소매 걷은 하얀 셔츠에 두꺼운 옥스퍼드 재질의 물감 묻은 앞치마와 항상 적당한 크기의 이젤과 팔레트, 예전 드라마에서는 화가 역할의 남자배우가 담배 파이프를 물고 있기도 했다.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고흐와 피카소를 떠올리면 화가의 모습은 좀 더 선명해진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자르는 괴이한 행동과 은둔형 작업과 우울과 고독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며 단명한, 세상없는 불운한 운명의 소유자다. 그와 상반되는 피카소는 일생에 걸쳐 왕성하게 활동하며 부와 명성을 얻었고 수많은 뮤즈의 사랑으로 아흔 살이 넘게 장수했다. 아마도 남성 화가 모자의 전형적인 이미지는 피카소가 쓴 베레모의 형상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해 본다.
작고 여린 나의 청년 화가는 혼자 들기에도 버거운 대형 캔버스 작업으로 개인 전시회를 열었다. 숙명적인 후원자이신 그녀의 어머니가 열심히 캔버스를 옮긴다거나 작품 포장과 운반도 함께 거들어 주셨다. 전시 제목도 만들어 붙이고 설명문도 프린트해 두었다. 소소하지만 관람객에게 내놓을 음료와 다과도 준비했다. 전시회를 준비하는 작가에 흔한 일상이다. 그녀의 작품은 나를 사로잡았고 순간 감정이 폭발해 눈물이 났다. 다소 민감한 사람들에게 종종 나타나는 일종의 명화 증후군인 ‘스탕달 신드롬’. 스탕달(Stendhal, 본명은 Marie-Henri Beyle, 1783~1842)은 1817년 이탈리아 피렌체 산타크로체 대성당을 방문했다. 그는 위대한 예술작품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심장박동이 빨라지며 현기증과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의 정신적, 육체적 혼란을 경험했고 이 증상은 한 달 동안 지속되었다고 한다. 가끔 우리는 뛰어난 예술작품 앞에서 이런 경험을 하게 되고 시간적 공간적 서사적 상황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라고 한다.
뛰어난 예술작품이 유명한 대가의 작품과 항상 등치되지 않는다는 것을 다소 덜 민감한 나는 알게 되었다. 이탈리아까지 가지 않고도. 예전에 피렌체 한복판에 있는 박물관에서 5미터가 넘는 다비드 조각상을 올려 보며 소름 끼쳤던 그 순간의 전율을 다시 느끼게 해준 우리 동네, 나의 청년 화가는 전시회를 마치고 동료 청년 화가처럼 서울로의 이전을 신중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먼저 간 동료 화가는 서울에서 소위 잘나간다고 한다. 전시회 기회도 많고 무엇보다 작품판매가 가능한 미술시장이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으며 작업을 계속 이어 갈 수 있는 잘 나가는 작가가 될 가능성은 지역과 비교불가다. 문화예술의 지역 균형을 논하기에 다소 급진적인 나도 이제는 좀 지친다.
때로는 비현실적이고 저 멀리에서 신화화된 예술가의 일상을 우리는 잘 알지 못하지만 지금 우리 동네의 젊은 청년 화가가 지역을 떠나 서울로 가야 할까라는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지역에서 스탕달 증후군이 널리 퍼지기만 기도해야 할까. 나의 작고 여린 청년 화가에게 감히 어떤 조언도 할 수 없었다. 지역에서 문화예술을 기획하고 사업한다는 나는 부끄러운 어른이 된 것 같다.
김미희 올아트22C 문화기획 대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