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비가 내린 다음 날 눈을 보러 통도사 영축산으로 갔다. 금정산과 백양산에는 비가 내렸지만 1000ｍ가 넘는 산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 따뜻한 곳에서 편안하게 눈을 볼 수는 없으니 고생이 되더라도 추운 곳을 찾아가야만 한다. 그날 영축산에서도 8부 능선에 올라서니 눈이 보였다. 눈 구경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눈꽃은 가장 높은 정상 부근이 제일 화려했다. 가장 추운 곳에서 그토록 아름다운 눈꽃이 피어나다니!

우리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마냥 편안하게 쉬기만 하면 몸이 점점 약해진다. 힘들더라도 운동을 해야 건강을 지킬 수 있고, 빈둥빈둥 놀기만 하면 돈이 다 빠져나가 버린다. 고된 노동을 해야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치일 것이다.

어느 해 겨울에 기차를 타고 구미 금오산에 간 적이 있다. 부산에서는 눈을 보기가 어렵기 때문에 눈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안고 갔다. 산 입구부터 칼날 같은 바람이 온몸을 사납게 후려쳤다. 부산 추위는 추위도 아니었다. 장갑을 두 개나 꼈는데도 손이 시렸다. 어찌나 추운지 올라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멀리까지 간 것이 아까워서 계속 올라갔다. 처음에는 엄청 춥더니 산속으로 들어가자 바람이 약해졌고 몸도 훈훈해져서 견딜만했다. 가파른 오르막길이 끝나고 황소 등처럼 편편한 안부에 올라서자 여태까지 보지 못한 신세계가 펼쳐졌다. 나뭇가지에 눈과 얼음이 얼어붙어 모빌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댕그렁, 딩동댕, 딩동 댕동!”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영롱한 고드름 모빌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산을 몇십 년 올랐지만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대자연의 장엄한 연출에 감동해 온몸에 전율이 올 정도였다. 만약에 춥다고 올라가지 않았더라면 그런 진풍경이 있는지조차 몰랐을 것이다. 나는 그날 다시 한번 깨달았다. 아무리 힘들어도 도전을 해야 무엇이든 얻게 된다는 것을.

봄꽃이 피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까운 수목원으로 갔다. 매화와 산수유가 활짝 피어 있었지만 날씨는 여전히 쌀쌀했다. 철모르고 핀 것 같아 만개한 꽃들이 안쓰러웠다. 꽃이건 사람이건 고생 안 하고 포근한 봄을 맞으면 좋을 텐데, 해마다 겨울은 쉽게 물러가지 않고 끝까지 심술을 부린다. 구름 끼고 음산한 날씨에 찬 바람까지 쌩쌩 불었다. 계곡물에 손을 넣어보니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봄꽃을 시샘하는 추위를 보니 오래전의 교육대학 졸업식이 떠올랐다. 그날도 2월 중순이 지났건만 추워서 손이 곱았다. 운동장에 의자를 갖다 놓고 행사를 치렀는데 귀가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그 당시는 졸업을 하고도 바로 발령을 못 받았기 때문에 봄을 눈앞에 두고도 마음이 스산했다.

다행히 어느 선배의 주선으로 3월 한 달간 임시교사를 하게 되었는데 첫 출근을 한 날 초겨울처럼 추웠다. 그때는 난방이 부실한 데다 교실이 하필 음지라 수업을 하면서도 덜덜 떨었다. 그렇게 추운 날씨였는데도 어떤 여학생은 얇은 웃옷에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멋을 부리는 건 좋지만 보는 내가 더 춥게 느껴졌다.

봄꽃이 필 때쯤이면 꼭 가슴앓이를 한다는 사람이 있다. 꽃망울이 몽글몽글 솟아오를 때면 왠지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고 눈물이 자꾸만 나온다나. 집안에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온산을 헤매고 다니거나 여행이라도 훌쩍 떠나야 그 증세가 가라앉는다고.

찬란한 봄을 맞기 위해서는 뭔가 대가를 치러야 하나 보다. 동장군의 마지막 공세를 견디다가 독감에 걸려 호되게 앓기도 하고, 새로운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도전했다가 고배를 마시고 허탈한 마음을 추슬러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희망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고난과 시련은 잠시 한때일 뿐이지 끝없이 이어지는 것은 아닐 테니까.

나무도 꽃샘추위를 이겨내야 더 단단해질 것이고 사람도 가파른 오르막길 같은 고비를 잘 넘기면 편안한 안부에 이르게 되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