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큰 인기를 얻었던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넘어갈 때마다 심호흡하며 숫자를 셋 센 뒤 폴짝 경계를 넘는다. 자폐인이 어떠한 이유로 그런 행동을 하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하나 새로운 공간은 비자폐인에게도 긴장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그것이 단순히 익숙하지 않은 공간 탓이든, 아니면 그 안의 낯선 사람 때문이든, 또는 새롭게 맞닥뜨릴 사건 때문이든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I 성향의 필자도 낯선 사람과 낯선 공간과의 만남이 있을 때면 경계 넘기를 일부러 늦추기도 한다.

우리의 복잡한 환경에도 수많은 경계가 존재한다. 한국과 외국, 부산과 경남, 주거지역과 상업지역, 너희 집과 우리 집까지. 그래서 도시와 건축에는 그 경계에 완충공간(buffer space)을 둔다. 사전적 의미로는 ‘서로 성격이 다른 지역 또는 시설 사이에 설치하여 간섭에 의한 피해 및 위화감을 줄이기 위하여 설치하는 공간’으로 DMZ도, 도시의 녹지공간도, 주택가의 골목도, 아파트의 발코니도 모두 이 사회가 마련한 뽁뽁이 같은 완충공간이다. 어쩌면 얼마 전까지 서로의 호흡이 바이러스 확산의 원인이 되었던 시절의 사회적 거리도 병리학적 완충공간일 것이다. 우리는 얼마 전까지 골목이라는 완충공간에서 이웃의 보호를 받으며 첫 번째 사회생활과 놀이를 하며 성장했다. 그렇게 완충공간은 서로의 사적 공간을 보호하면서도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쇼펜하우어의 ‘호저 딜레마’와 같은 적정 거리였다. 이를테면 수많은 도시의 ‘우영우’들을 위한 공간이 도시에 마련되어 있었다.

최근 SNS에서 사회생활 경험이 있는 한 사람이 직장인의 메일 작성법에 대하여 인사와 스몰토크, 그리고 용건까지 체계적으로 정리한 글을 올린 적이 있었다. ‘아…나름 잘 정리했네’ 생각했는데, 그 뒤로 이른바 관계의 경계를 부드럽게 하는 ‘쿠션어’의 필요성에 대한 논란이 이어졌다. 그것은 관계의 완충 역할이 주로 약자에게 의무 지어짐을 비토하는 주장이었다. 막말을 하고, 과속 운전을 하고, 거침없이 완충재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권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젊은 세대에게 호저의 가시를 받아내는 완충 역할을 강요하지 말라는 주장이었다.

경계는 어떤 모습일까. 도시 공간의 경계는 언뜻 체감하기 힘들지만, 과학의 영역에서는 비교적 명확히 그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쉽게 얼음만 관찰해봐도, 물이 얼면서 가시와 같은 결정들이 생성되고 점차 무수히 겹쳐가며 경계를 확산해 가는 모습이다. 비물질적 영역에서도 DMZ와 부산 개항의 순간을 떠올려보면 양쪽에서 뻗쳐오는 첨예한 호저의 가시들이 서로 겹쳐지는 과정이 경계의 모습이다. 그리고 사상과 문화와 문명의 가시들이 경계에서 유입과 충돌과 확산의 모습을 만들어내는 것이 경계의 결정체이다. 그래서 서로 다른 성질의 무언가가 만나는 접점, 이 얼음 결정처럼 아름다운 경계의 공간 ‘계면(界面)’은 중요한 사회적 물리적 탐구 대상이다.

부산이 서울이나 다른 지역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개항을 하면서 외세의 침범과 함께 다양한 문화가 항구를 통해 들어오고,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해외의 문물이 서울보다도 오히려 부산으로 먼저 유입되었다. 안테나를 조금만 맞추면 미국과 일본 방송도 볼 수 있었고 깡통 시장에는 온갖 해외 문화가 말 그대로 국제적으로 펼쳐졌다.

그래서 부산은 대한민국의 경계 도시이며, 부산항은 바다와 육지의, 그리고 한국문화와 해외문화가 가장 먼저 유입되고 충돌하며 확산하는 경계 지역이다. 그리고 경계의 가시와 가시가 겹치는 틈에서 새로운 문화의 씨앗이 싹트는 것이다.

코로나로 우리 삶에 새로운 경계가 생겼던 시절, 공연을 하지 못하게 된 외국의 한 음악가가 발코니에서 연주하는 모습이 크게 화제가 되었다. 우리 사회는 전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아파트의 완충공간인 발코니를 없앴으며, 사회적 자궁이라는 주택가 골목도 사라지게 했다. 매력적인 문화는 경계의 틈에서 핀다. 부산은, 북항은, 부산 사람은 경계의 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