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의 저명한 도시계획전문가 찰스 몽고메리는 ‘걷기 좋은 도시가 살기 좋고 행복한 도시’라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계에서 살기 좋기로 이름난 도시들은 하나같이 편리하고 안전한 보행환경을 지녔다. 비엔나 코펜하겐 취리히 제네바 밴쿠버 토론토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불리는 덴마크의 코펜하겐 도심은 그야말로 ‘보행자 천국’이다. 이곳 중심가 1.2㎞는 보행전용공간으로, 유럽에서 가장 긴 ‘차 없는 거리’이다.

역사적으로 도시의 보행환경과 보행권 논의는 1950~60년대 유럽을 중심으로 시작됐다. 자동차 위주 교통 문제가 제기되고, 지속 가능한 발전과 도시재생이 화두로 떠오른 영향이다. 그에 따라 보행자 중심의 도로 조성 개념이 등장하고, 1988년 유럽의회는 ‘보행자권리헌장’을 공포했다.

우리나라에서 보행권 확보를 위한 시민운동이 펼쳐진 것은 1993년 무렵이다. 이어 1997년 서울시 보행조례가 제정됐고, 이는 전국 자치단체로 확산됐다. 이런 흐름을 타고 2010년에는 마침내 ‘보행 안전 및 편의 증진에 관한 법률’(보행안전법)이 제정돼 이듬해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이는 세계 최초의 보행 입법으로, 보행권 보장을 법에 규정하고 보행환경 개선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무임을 명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최근 ‘이태원 참사’를 계기로 보행안전법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 법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고가 난 장소는 지하철역에서 이태원 번화가로 연결되는 지름길인데, 그 골목의 너비는 3.2ｍ에 불과하다. 성인 6명이 나란히 서면 거의 꽉 찰 정도이고, 내리막 경사도 심한 길이다. 여기에다 무허가 시설물까지 있었다고 하니, 길이 더 좁아지면서 병목현상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보행환경과 보행자 안전은 뒷전으로 밀려난 셈이다. 사실, 당초의 보행안전법안에는 보행로에 통행을 방해하는 시설물 등의 설치를 금지하고 그로 인해 사람이 다치면 처벌하는 조항도 들어있었는데, 막판에 삭제됐다고 한다.

내일 11일은 ‘보행자의 날’이다. 기후변화 가속화와 에너지 위기 대응, 감염병 증가, 국민건강 등을 감안하면 걷기와 도시 보행환경 개선의 중요성은 갈수록 커질 것이 뻔하다. 현행 보행안전법 제4조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국민이 쾌적한 보행환경에서 안전하고 편리하게 보행자길을 통행할 수 있도록 정책을 수립·시행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걷기 좋고 살기 좋은 도시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보행안전이 우선돼야 한다.

구시영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