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너 살고 나 살고

국제신문
| 입력 : 2022-08-03 19:04:34
| 본지 18면

재작년 2월 뒷산에서 주워다가 싹을 틔운 도토리나무의 녹음(綠陰)이 제법이다. 도토리는 나무로부터 30여 ｍ 떨어진 곳에서 발견했는데 다람쥐가 숨겨둔 게 틀림없었다. 겨울철에서 이른 봄의 뒷산은 다람쥐들이 가을에 묻어놓은 도토리를 파내어 먹는 모습을 간혹 보여준다. 신기한 것은 다람쥐들이 가을에 묻어둔 도토리를 다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토리나무의 번식을 도와주기 위함인지는 알 수 없으나 결과적으로 다람쥐는 도토리를 식량으로 하면서 열매 이동을 통해 나무의 번성을 돕는 셈이다. 생존기반 사이의 ‘너 살고 나 살고’의 ‘주고받음’이다. 살아남기 위한 자연의 지혜다.

생물의 역사에서 생존기반의 중요성을 일찍이 알아차린 것은 곤충과 포유류였다. 꽃식물의 꽃가루와 꿀을 먹이로 선택한 곤충들은 자기의 생존기반인 식물의 번식을 돕기 위해서 가루받이 기술을 개발해 서비스에 나섰다. 식물의 열매를 선택한 포유류도 씨를 멀리까지 날라주는 봉사를 통해 식물의 번성을 도운다. 그 결과 이들은 지구 상에서 가장 번성한 종이 됐다. 공룡이 하루 1ｔ에 가까운 나뭇잎을 먹어치우면서 숲을 일방적으로 훼손하는 ‘너 죽고 나 살고’를 하는 동안 곤충과 포유류는 ‘너 살고 나 살고’ 식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했다.

미국 프린스턴대학 생명윤리학과 교수 피터 싱어는 현대철학이 풀어야 할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는 ‘상생(相生)의 생명윤리’ 문제라 했다. 이것은 생존경쟁의 본질에서 출발한다. 유한한 자원을 두고 경쟁하기 때문이다. 자연에서의 생존경쟁은 ‘너와 나’ 그리고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여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너 죽고 나 살고’ ‘너 죽고 나 죽고’ ‘너 살고 나 죽고 ’ 너 살고 나 살고’의 4가지 경우이다. 하지만 자살폭탄테러처럼 ‘너 죽고 나 죽고’와 살신성인(殺身成仁)의 ‘너 살고 나 죽고’는 일상사가 아니다. 대부분의 삶이 선택하는 것은 ‘너 죽고 나 살고’다. 이건 지속 가능한 생존 양식이 아니다. ‘나’의 생존기반인 ‘너’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프랑스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는 주고받음에 의해서 인간사회의 삶이 유지된다고 했다. 인류학에서는 결혼까지도 그 본질적 의미를 부족 간, 가문 간 사람의 주고받음으로 본다. 누이동생을 옆 마을로 시집보내고 그 마을에서 아내를 맞아오면 마을 사이의 사회적 주고받음이 더욱 활발해지게 된다. 자연생태계 속의 주고받음은 먹이 제공과 번식을 도와주는 것이지만 인간사회에서는 모든 물질적·정신적 가치가 주고받음의 대상이다.

‘그는 봉투를 열었다. 20마르크짜리 지폐가 한 장 떨어졌고 한 장의 종이쪽지가 들어있었다. “약소하나마 사랑의 마음으로 엄마가”라고 거기에는 씌어 있었다. (…) 지금 어머니는 기차 속에 앉아 있고 얼마 안 가서 그가 핸드백에 넣어 놓은 20마르크짜리 지폐를 발견할 것이다. 수학적으로 보아서는 이 결과는 영이었다. 왜냐하면 지금은 둘 다 전과 같은 액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행은 차액 계산을 거부한다. 도덕방정식은 산술방정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독일의 소설가 에리히 캐스트너의 ‘파비안’에 나오는 내용이다. 아들은 어머니를 위해 20마르크를 썼고 어머니가 준 20마르크가 생겼으니 40마르크의 이득이 생긴 셈이다. 어머니 역시 40마르크의 이득이 생겨 모자지간에 총 80마르크의 행복이 생겼다.

인간도 오래전에는 동식물과의 관계가 사냥과 채취로 ‘너 죽고 나 살고’였다. 그러다가 약 1만 년 전부터 그들을 사육하고 경작함으로써 공생의 관계로 발전했다.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축의 시대 현자(賢者)들은 개인이 겪는 고통은 물론 사회적 갈등의 원인이 ‘자기 중심주의’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달았고, ‘내가 먼저 주면 주는 것이 내 것이 된다’는 윤리적·과학적 원리를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