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여왕 5월이다. 4월이 ‘아프릴리스,’ 즉 개화(開花)의 달이라면 5월은 ‘마이아,’ 즉 성장의 달이다. 그런 만큼 5월이 되면 봄은 성큼 성장하여 여름을 대비한다. 5월은 또한 분주함의 계절이다. 추위는 물러나고 그렇게 덥지도 않아 밝고 따뜻한 햇살 아래 나들이나 여행하기에 딱 좋은 계절이다(따라서 봄은 역시 유희와 휴식, 즉 ‘놂’의 계절일 것이다). 서구에서 5월에 여행과 상업을 관장하는 헤르메스의 어머니 ‘위대한 여신’ 마이아의 이름을 붙인 것이 새삼스레 의미심장하다.

3월에 찾아와 5월까지 우리 곁에 머무는 봄은 참으로 은혜로운 계절이다. 봄이 은혜로운 첫 번째 이유는 우리의 기대와 바람을 저버리지 않고 때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엄혹하고 침울한 한겨울 칼바람에 한껏 몸을 움츠리고 옷깃을 여미다 보면 이러다 봄이 정말로 올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춘분이 지나고 해가 길어지면 거짓말같이 계절의 냄새가 바뀌고 날이 조금씩 따뜻해지기 시작한다. 물러갈 때를 모르고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동장군의 심술도, 새 움이 돋아나는 것을 시기하여 들이닥치는 꽃샘추위도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한 걸음씩 다가오는 봄의 행진을 막을 수 없다. 기다렸던 봄이 마침내 찾아오는 그 놀라운 경험은 기울어진 자전축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이처럼 봄은 다시 ‘옴’으로써 대지와 모든 생명붙이들에게 은혜를 베푼다.

두 번째 이유는 봄이 대지의 모든 것을 되살려 기적과 같은 시각적 성찬을 베풀기 때문이다.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 화가인 산드로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의 화면 오른쪽에는 차가운 서풍 제피로스가 꽃의 님프 클로리스를 껴안으려고 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여기서 아무런 무늬가 없는 얇은 흰옷 하나만 걸치고 있는 클로리스는 헐벗은 대지를 상징한다. 이들 바로 왼쪽에는 제피로스와의 결합으로 이제는 꽃의 여신 플로라로 변한 클로리스가 서 있다. 그녀는 다양한 꽃장식이 수놓아진 화려한 옷을 입고 있으며 만개한 꽃의 여신답게 머리에는 화관을 쓰고 목에는 화환을 걸친 모습으로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프리마베라’에는 약 500종의 꽃들이 대지를 가득 채우고 있는데 이런 묘사야말로 봄을 맞아 화엄(華嚴)의 장관을 이루는 땅의 생명력을 유감없이 표현한 것이리라. 봄에는 꽃뿐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생동하고 준동하며 약동한다. 무채색 대지를 화려한 무대로 변모시키는 찬란한 햇살과, 지나는 길의 모든 것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온화한 미풍과, 하릴없이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속에서 가물거리는 봄날의 풍경은 무심코 지나쳤던 모든 사물들에게 새로운 눈길을 돌리게 만든다. 그리하여 눈이 바쁘고 눈이 즐거운 봄은 이름 그대로 ‘봄’의 계절이다.

봄의 절정인 5월이 지나면 화사한 봄꽃들이 거의 다 지고 신록의 부드러운 잎들도 짙은 녹색으로 단단해진다. 점차 뜨거워지는 햇빛을 조금이라도 더 받기 위해서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식물들의 왕성한 성장은 열매 맺힘, 즉 ‘열음’의 계절에서 절정을 이룬다. 고대 로마인들에게 여름의 첫 번째 달인 6월은 제우스의 아내 헤라에 해당하는 유노의 달이었다. 유노는 신성혼과 가정의 수호여신이다. 인간의 생애주기에서 6월 초여름은 청년기에 해당한다. 고대에는 대개 청년기의 모든 남녀가 결혼으로 맺어졌다. 그리고 그 결혼의 가장 큰 결실은 무엇보다 아이들이었다.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성숙한 후 때가 되면 알아서 짝을 짓고 후손들을 생산한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순환주기는 계절의 순환주기와 많이 닮아 있다. 계절의 주기에서 신생의 봄은 성숙의 여름을 지나 결실의 가을과 쇠락의 겨울을 지나 또 한 번의 주기가 완성될 때까지 우리 모두를 다그치고 몰아간다. 봄은 만물을 주기의 궤도 위로 ‘몲’으로써 사계절로 대변되는 영겁회귀의 주기를 스스로 완성한다(그러므로 봄은 돌고 도는 ‘돎’의 계절이기도 하다). 봄이 은혜로운 세 번째 이유다.

‘춘래불사춘’이라고들 한다. 요즈음 들어 더 자주 들을 수 있는 탄식이다. 어느 시대나 서민의 삶은 팍팍했으니 꽃이 피고 지는지, 벌과 나비가 날아다니는지 눈치채지 못할 만큼 바쁘게 사느라 모두가 봄을 차분히 누리고 즐길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다는 말이겠다. 봄을 완상하기에는 사는 것이 투쟁이고 삶의 자리가 곧 전쟁터가 아니냐는 이유 있는 항변이겠다. 하긴 로마에서 봄의 첫 번째 달인 3월 ‘마르티우스’의 주인은 전쟁의 신 마르스였다. 날이 풀려 만물이 기지개를 켜는 봄이 역설적으로 전사들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던 전쟁과 살육의 시즌이기도 했으니 생의 전장으로 내몰린 우리가 생명으로 들끓는 봄의 치열함을 긍정하지 못하고 오히려 버거워하는 것도 겨자씨만큼은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 찬란한 5월의 하늘 아래 잠시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