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발(發) 금융위기로 세계 경제가 한창 위기였던 2009년 초 세계 금융계에 작은 파장이 일어났다. 비트코인이라는 가상화폐의 등장 때문이었다. 나카모토 사토시라는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개발한 비트코인은 정부나 중앙은행의 통제 없이 발행되는 디지털화폐였다. 당시 전문가들은 사이버 세계에서 통용되는 IT프로그램의 사생아쯤으로 여겼다.
그러나 10년 지난 뒤 사정은 달라졌다. 비트코인은 기존 화폐와 금융시장에 큰 영향을 미치는 자산화폐로 부상했다. 단기간에 비트코인이 성장한 데는 코로나 대유행이 한몫을 했다. 경기회복을 위해 세계 각국이 금리를 낮추고 막대한 돈을 뿌린 탓이다. 블룸버그 집계에 따르면 코로나가 본격화된 2020년과 2021년에 세계 화폐 증가량은 평균 15%에 달한다. 특히 기축화폐인 미국 달러의 폭증으로 가치가 급락한 것이 비트코인의 부상에 결정적이었다.
비트코인뿐만 아니라 다양한 가상화폐가 출현하면서 세력을 확장하자 세계 금융계는 당황했다. 기존 통화질서가 흔들릴지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결국 비트코인의 존재를 외면하던 미국 정부와 연방준비제도는 가상화폐 거래소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가상화폐를 미국 달러의 통제권에 두려는 고육지책이었다. 하지만 과잉 재정확대에 따른 인플레이션과 달러가치의 하락, 가상화폐의 성장속도를 보면 미국의 계획이 성공할지는 미지수다.
미국 달러는 1944년 브레턴우즈 체제 출범 이후 80년 가까이 세계의 기축통화로 확고부동한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달러패권은 수많은 도전과 위기를 맞고 있다. 1960년대 베트남전쟁과 1970년대 오일쇼크는 미국 달러의 기축통화 자리를 위협한 첫 번째 고비였다. 당시 미국이 전쟁비용과 석유확보를 위해 막대한 돈을 찍어내면서 달러 가치가 폭락했다. 이즈음 미국 달러가 금본위를 포기한 것도 기축통화의 입지를 흔들었다.
미국 정부와 연방준비제도는 ‘달러재건’을 외치며 1980년부터 10년간 연 20%에 달하는 고금리정책을 폈다. 극약처방은 ‘달러패권’을 지키는데 성공했지만 미국 경제를 지탱하던 주력 제조업이 붕괴하고 대량실업이 발생하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달러패권을 되찾기 위해 전통 제조업을 희생시킨 꼴이었다. 대신 고금리로 돈방석에 앉은 금융사들이 월스트리트로 몰려 금융업이 급성장했다.
미국 제조업이 붕괴한 틈을 비집고 일본이 파고들었다. 일본은 자동차 철강 조선 석유화학 반도체 등에서 미국을 대체하면서 초호황을 누렸다. 덕분에 일본 엔화는 미국 달러를 위협하며 세계 기축통화 반열에 올랐다. 호황을 누리던 일본은 비산유국이라는 약점과 한국 대만 등 후발 개도국의 약진으로 위기를 맞았다.
21세기 들어 미국 달러패권은 또 다른 위협에 직면해 있다. EU 출범에 따른 유로화의 강세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중국 위안화의 약진이 그것이다. 세계의 공장으로 떠오른 중국은 미국의 달러패권을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도전자로 떠올랐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 격화되고 있는 무역 갈등은 세계경제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한 예고된 충돌이다.
문제는 달러패권의 구도에 작은 균열이라도 생긴다면 세계경제 전체가 혼란에 빠지게 된다는 점이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이 OECD 가입국가를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를 보면 외환 보유고의 평균 60%, 자산 투자액의 평균 35%가 달러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국가의 무역결제도 평균 70%는 달러로 이루어진다. 달러 가치가 1%만 하락해도 각국의 자산 감소는 천문학적일 수밖에 없다.
대다수 경제 전문가들은 미국 달러가 미래에도 금에 버금갈 만큼 ‘영원한 안전자산’으로 남을 것으로 믿는다. 미국이 경제적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풍부한 천연자원과 시장지배력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막강한 금융 지배력과 IT산업의 경쟁력이 미국 경제를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계를 주도하고 있는 정치적 영향력도 미국 달러의 권위를 넘보기 힘든 이유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산업혁명 이후 세계 최강국으로 군림했던 영국의 ‘영원한 제국’ 야망도 백년을 넘기지 못했다. 80년을 넘긴 달러패권의 앞날도 장담할 수 없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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