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봄엔 보름쯤 늦게 혼자 당나귀봉으로 비바크(Biwak) 산행을 했다.

작년, 재작년엔 4월 초순에 올랐는데. 그맘때면 임도에 벚꽃이 한창 필 무렵이라, 당나귀봉 데크에서 하룻밤 자고(취사하면 안 되므로 발열 도시락과 김밥을 준비) 다음 날 꽃구경 삼아 종일 걷곤 했다. 임도를 따라 조성해 놓은 일광산에서 백운산까지의 트레킹 숲길은 1박 하면서 걷기엔 안성맞춤이었다.

당나귀봉은 기장군 철마면에 있는 소산봉의 별칭이다. 소산마을 뒤편의, 그다지 높지도 뾰족하지도 않은 산봉우리다. 애초 누가 지었는지 모르겠는데 ‘당신과 나의 귀한 만남’이란 뜻으로 지은 이름이라나. 여하튼 산봉우리로서의 면모는 보잘것없으나 전망 하나만큼은 기막히다. 사방이 탁 트여 맑은 날이면 웬만한 거리의 부산 시내를 360도 조망할 수 있으니까.

발열 도시락으로 떡국을 끓여 먹고 벤치에 앉아, 보온병에 담아온 뜨거운 물로 커피를 탔다. 밤하늘의 별을 보며 산봉에서 커피를 마시는 멋이란! 산 정상이라 밤에는 아직 춥지만, 침낭 안으로 일찍 들어가고 싶지는 않아 괜스레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당나귀봉이라 새겨진 비석 뒷면도 헤드 랜턴으로 비춰보고. ‘당신과 나의 귀한 만남’이라….

왔다 갔다 하며 줄임말의 당나귀를 되뇌는데, 예전에 읽었던 소설 하나가 떠올랐다. 문학사적으로 인류 최초의 장편소설이라는 ‘황금 당나귀’. 이 소설은 지은이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가 당나귀로 변신하여 온갖 모험을 겪는 이야기다. 문학 분야에서의 당나귀는 고집이 세고 아둔하다는 등의, 하찮은 존재라는 은유로 많이들 사용되곤 한다. 그렇듯 당나귀로 변했던 주인공 루키우스는 끝내 다시 자신을 찾게 되는데, 그 때문에 존귀함의 표현으로 ‘황금’ 당나귀로 상징한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현실에서 당신과 나의 귀한 만남도, 당나귀봉처럼 일부러 그런 의미를 갖도록 이름을 짓는 이유도 본질적으론 ‘관계성’에 기인한다. 사람 간의 관계성을 생각지 않아도 되는, 이 세상에 나 혼자뿐이라면야 하찮든 귀하든 의미를 둘 필요조차 없으므로. ‘황금 당나귀’에서의 변신 이야기도 바로 그 관계성 때문에 사건이 엮어진다. 그 소설에서는 인간들과의 관계는 물론 신들과의 관계도 나온다만. 어쨌든 그런 관계성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또는 주변 사람이 추해지기도 하고 고귀해지기도 한다는 사실은 틀림없다.

그 작품의 줄거리에서 알 수 있듯 인생 행로에서 중요한 건 변신이다. 스스로 변신하여 거듭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환경을 변화시켜서라도 그래야 한다.

요즘 자기 이름을 바꾸는 것도 변신하려는 계기의 일종이리라. 그렇게 해서라도 어떤 동기가 일어나면 정말로 습관이나 품성이 달라지기도 하거든.

소산봉이 그렇지 않은가. 당나귀봉이라 부르지 않았으면 그냥 지리적인 산봉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나 ‘당신’이라는 관계성을 한 번쯤 생각하게 만든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당신이라는 대상이 누구인지부터 시작해, 여태 살아오면서 가졌던 관계성이 귀했는지 아니면 추했는지를 돌아보게 될 테니.

나 역시 이 순간에 그동안 스쳐 간 여러 ‘당신’들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사람에 속하는 당신들뿐만 아니라, 무수한 별들과 꽃들과 짐승들에 관해서도. 덧붙여 그 만남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도. 이 세상엔 나 혼자만 있는 게 아니라서 부득불 여러 만남을 가져왔지만, 돌이켜 보면 사람들 간에는 귀한 만남으로 되지 않은 적도 많았다. 아니 만나는 순간만큼은 귀하게 여겼고 또 그렇게 처신했음에도 불구하고, 뒤가 그러지 못했다고 하는 게 더 옳지 싶다. 귀속 원인이 누구에게 있든.

은유적으로 드는 미련한 당나귀 같은, 고루한 ‘나’로 살지 않으려면 스스로가 변하는 방법이 가장 좋다. 그러지 못하다면 ‘당나귀봉’ 사례와 같이 새로 이름 짓거나 다른 의미를 부여해서라도 자신을 되새겨 보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고 땀 흘리며 산에 오르고 발이 부르트도록 걷는 것 아닌가.

오늘 밤에는 별들도 나더러 각성하라고 채찍질하려는지 따끔한 빛발을 내리쏟는다. 이 또한 귀한 만남이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