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사기 가운데 ‘항우본기’ ‘고조본기’ ‘여태후본기’를 읽다 보면 대비를 이루는 두 여인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그 한 여인은 초패왕 항우가 사랑했던 조용하고 가녀린 우(虞)라는 미인이고, 또 한 여인은 한나라 왕 유방의 기발하고 요란한 아내 여치이다. 치의 아버지는 관상을 잘 보는 여공(呂公)이란 사람인데 유방의 관상을 보고 장차 황제가 될 사람인 것을 알아차리고 치를 유방에게 주었다. 그녀는 한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 한고조의 여태후가 되었다.
유방의 젊은 시절 아직 고향 패현에 머물고 있을 때, 진시황제는 패현에 천자의 기운이 있음을 알고 유방을 잡으려고 하자 그는 망탕산 위에서 숨어 지냈다. 여치는 한 번씩 남편을 만나기 위해 산에 올라갔는데 용케 남편을 찾아갔으므로 패현의 젊은이들이 그 방법을 물었다. 여치가 대답했다. “유방이 있는 산봉우리에는 언제나 하얀 구름이 감돌고 있기 때문에 그곳을 찾아가면 유방이 있다”고 꾸며댔다. 이 얘기를 그대로 믿은 청년들이 장래가 유망한 유방의 군사가 되기를 앞 다투어 자원했기 때문에 그 세력이 급속도로 팽창하게 되었다.
여치는 어려서부터 꾀보였고 총명했으므로 남편의 출세를 앞당기는데 큰 역할을 했다. 유방이 항우를 무찌르고 천하를 통일한 후 한나라 고조가 되었고 BC 195년 장락궁에서 죽었다. 한나라 제2대 황제 혜제가 뒤를 이어 즉위했지만 여태후가 된 치가 권력을 장악하여 군림했다. BC 180년 그녀가 죽기까지 15년 간 봉건제국을 이끌었다. 후에 한무제(BC 140~87) 때를 전후하여 활동한 저 굴지의 사학자 사마천이 ‘사기본기’에 ‘여태후본기’를 따로 모아 편집해 넣지 않으면 안될 만큼 탁월한 정치실력을 인정받은 여인이다. 그러나 유방이 살아생전 가장 총애했던 척(戚)부인을 오랜 세월동안 시기했던 여치는 돼지우리 같은 공간을 만들어 척 부인의 손발을 잘라냈고 눈을 찔러 장님을 만들었으며 귀를 태워 없애고 혀를 잘라 벙어리로 만든 뒤 가두었다. 그리고 자기가 낳은 효혜 황제를 불러서 그 비참한 모습을 보게 했다. 이 사람이 척 부인인 것을 알아차린 순간 효혜는 충격을 받아 쓰러진 후,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몇 달 후 죽었다.
항우(BC 232~202)는 본래 초(楚)나라의 무장 집안에서 태어났다. 진시황의 제국이 무너진 후 자칭 초패왕이 되어 한나라왕인 유방과 7년 동안 자웅을 겨루었다. 최후의 결전은 BC 210년 12월, 지금의 안휘성에 있는 해하(垓下)지역에서 있었다. 이때 이미 항우의 군대는 그 세력이 약화되어 호왈 10만 명이라 했으나, 당시 항우의 군대가 처한 모든 조건들을 종합해보면 아마도 5만 명 미만의 병력이었을 것이다. 유방의 군대는 호왈 30만 명이었고, 당대에 백전백승의 전략가인 제(齊)나라 왕 한신이 총사령관이었으니 전쟁은 이미 끝나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날 밤이 깊어지자 초나라 진중에는 멀리서 들릴 듯 말 듯 초나라 민요가 처량한 피리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점점 피리소리가 가까워지자 수심에 차 피리소리를 듣고 있던 우미인이 잠들어 있던 초패왕 항우를 깨어 일으켰다. 우미인이란 사마천의 ‘사기본기’의 ‘항우본기’편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항우가 총애하던 여인인데 그는 항상 진중에 이 여인을 데리고 다녔다. 잠을 깬 항우가 장막 밖으로 나가 상황을 살펴보고 돌아와 풍운의 세월이 끝남을 짐작하고 시 한수를 지어 읊었다. 가까이서 피리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시의 내용을 필자가 간추려보면 ‘이제 모든 것이 끝나가네…우 야! 우 야! 너를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라고 읊으며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이제 항우라는 천하를 호령하던 대장부의 포부가 꺾이는 급박한 상황에서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지만 사랑하는 여인 우미인만은 살려내고 싶다는 장부의 마음이 담겨있어 애처롭다. 항우가 시를 읊으며 흐느껴 울었으므로 근위기병대 장수들도 좇아서 눈물을 흘린 것으로 기록됨으로써 항우와 우미인과의 애틋한 이별장면이 끝난다. 그 이후, 우미인의 운명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항우가 성화 같은 근위대 장수들의 권고로 말을 타고 달리기 시작했을 때 기병대 수요가 고작 800기였다. 한나라 군대의 포위망을 뚫고 초나라를 향해 남으로 달릴 즈음에는 100기에도 못 미치는 초라한 기병대로 전락했다. 드디어 항우가 초나라로 가기위해 오강(烏江)의 강가 나루터에 도착했을 때, 급히 건너가기를 권고하는 오강의 정장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지금 와서 무슨 면목으로 고향에 돌아가 초나라 부형들을 만나겠나?”라고 하며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아마도 우미인과 함께 도망 해 왔다면 항우는 강을 건너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미인의 미모는 5월 훈풍에도 꽃잎이 꺾여서 바람에 나부끼는 새하얀 양귀비꽃 같은 그런 절세의 아름다움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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