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이 EU에서 탈퇴한 브렉시트의 영향으로 청산소(clearing house)를 두고 EU와 영국 사이에 흥미로운 긴장관계가 형성되고 있다. 지난 2월 EU는 역내 금융회사의 영국 청산소를 통한 청산 허용기한을 당초 예정 기한이었던 올해 6월에서 2025년 6월로 3년 더 연장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이번 연장이 마지막이며, 올해 상반기에 EU의 청산기능 제고방안을 마련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영국은행 총재는 기한 연장은 일단 환영하지만 EU 금융회사의 영국 청산소를 통한 청산 자체를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청산소의 역할이 어떤 것이기에 EU와 영국이 이를 두고 대립하는 것일까. 청산소는 단어에서 보듯이 깨끗한 상태로 만드는 장소를 말한다. 18세기에 런던에는 은행 간에 수표와 현금을 교환하여 잔액을 맞추기 위해 은행 직원들이 모이던 장소가 있었다. 그곳이 바로 청산소의 효시다. 금융중심지 런던에서 자연스럽게 청산소가 발달했다.
금융회사가 서로 금융거래 계약을 체결하면 당연히 결제가 뒤따른다. 계약 건수가 한두 건이 아니고, 거래당사자도 많다 보니 수많은 결제업무가 발생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수많은 거래내역을 모두 정리하여 한꺼번에 처리하면 편리하고 효율성도 높아질 것이다. 금융회사들 사이에 누군가가 책임지고 그 일을 처리한다면 안정성도 배가될 것이다. 청산소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한다. 청산소가 금융회사들 사이에 주고받을 몫을 정하고, 금융회사들은 청산소를 통해서 결제를 한다. 이때 청산소가 모든 계약의 법적인 ‘거래상대방’이 되어 결제이행을 보증하기 때문에 금융회사들은 안심하고 금융거래를 할 수 있게 된다.
우리나라 자본시장에서의 청산소는 한국거래소다. 지난해 한국거래소 증권·파생상품시장에서 일평균 95조 원의 거래가 있었다. 청산기능이 없었다면 수십 개의 회원사가 이 금액을 거래 횟수만큼 서로 주고받아야 한다. 그러나 실제 각 회원사는 하루 한 차례씩만 청산소인 한국거래소와 대금을 수수하면 되고, 회원사의 결제금액도 차감(네팅)이라는 과정을 통해 대폭 감소되어 일평균 3조7000억 원에 불과했다. 우리나라 자본시장이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이면에는 이와 같이 결제 횟수와 결제규모를 대폭 줄이고 결제이행을 보증하는 청산소의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청산소의 역할이 확대되었다. 리먼 브러더스라는 한 금융회사의 결제불이행이 다른 금융회사의 연쇄적인 결제불이행으로 확산되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2009년 G20 정상회의에서 금융회사 간의 장외파생상품 거래에도 청산소를 통한 청산을 의무화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도 2014년부터 한국거래소가 국내외 은행 간에 거래되는 원화이자율 스와프라는 장외파생상품의 청산을 시작했다.
런던청산소(LCH)는 명실상부한 글로벌 청산소로서 장외파생상품거래에 대한 청산을 주도하고 있다. 현재 유로화이자율 파생상품의 90%를 청산하고 있다. 브렉시트를 계기로 EU가 프랑크푸르트와 같은 역내 금융중심지로 유로화상품의 청산기능을 이전하려는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는 것은 금융시장 발전과 금융중심지로서의 위상에 미치는 청산소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한국거래소는 지난해 4월 부산에 ‘청산결제본부’를 신설했다. 거래소의 매매기능과 분리하여 청산결제 및 리스크관리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확보함으로써 청산대상 상품 확대, 위험관리 강화 등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국내에서의 금융거래뿐만 아니라 국경을 넘나드는 글로벌 거래에 대해서까지 청산서비스를 효율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시스템과 역량을 갖추어 나가야 한다. EU와 영국의 청산서비스 경쟁에서 보듯이 청산소는 금융시장의 핵심 인프라다. 한국거래소 청산결제본부가 우리 금융시장의 성장과 발전을 지원하고 촉진하여 글로벌 청산소로 발돋움하는 그날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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