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잖아 알알이 붉은 열매를 매단 채로 산수유꽃이 필 것이다. 꽁꽁 얼어 있어야 할 ‘북극 냉장고’가 지구온난화로 오작동을 일으키며, 지난겨울 극심한 가뭄과 이상기온을 만들어내곤 했지만 그래도 꿋꿋이 봄은 온다. 봄의 출현을 알리듯 꽃봉오리가 열리고, 노란 우산을 펼친 듯 20여 개의 꽃잎을 일제히 드러내는 산수유의 모습은 가히 장관(壯觀)이다.
동아시아가 원산인 산수유는 지구상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이후 거의 7000만 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꽃을 피워냈을 것이다. 이들은 잎 없이 꽃을 피운다. 산수유처럼 광합성 공장을 가동하지 않고 꽃을 피우는 성질 급한 식물들은 작년에 비축해 둔 식량을 조금씩 아껴가며 쓸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이른 봄꽃을 찾는 꿀벌들은 먼 거리를 움직이며, 적은 양일망정 부지런히 꿀을 모은다.
곤충이 날개를 달게 된 것은 오래전 고사리와 같은 양치식물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라났기 때문이라는 설(說)이 있다. 곤충이 주식으로 먹었던 양치식물의 포자가 높은 곳에 달렸기 때문이다. 날개를 갖춘 곤충은 기탄없이 날아 식물에 구멍을 뚫고 알을 낳는 장치를 발명하기에 이른다. 바로 침(針)이다. 애초 안전한 장소에 알을 주입하는 장치인 산란관으로 출발한 침은 또 다른 형태로 진화한다. 숙주의 몸에 자신의 알을 낳게 된 것이다. 기생말벌과 같은 녀석들은 숙주 벌레를 죽이지 않은 상태에서 보금자리와 영양소를 얻어 ‘손쉽게’ 자신의 알을 성장시킨다. 침에서 분비되는 독소는 숙주의 몸통을 마비시켜, 살아 있지만 옴짝달싹 못 하는 상태로 숙주를 옥죈다. 침을 가진 벌은 모두 암컷이다.
말벌의 침은 한쪽 성(性)에게만 생식이라는 과도한 짐을 부과하는 생물학적 장치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인간의 태반과 곤충의 침은 기능적 상동 기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꿀벌은 침의 기능을 사회적으로 분화시켰다. 일없이 빈둥거리며 오직 여왕벌에게만 정자를 공급하는 수컷 벌은 산란 기능을 독점한다. 반면, 움직이지 못하는 알과 번데기 그득한 육각형의 주거지를 지키는 일뿐만 아니라, 꽃과 꽃 사이를 돌며 식량을 확보하는 일은 모두 일벌 소관이다. 이러한 진화의 역사를 따져보면 기생말벌 조상에서 꿀벌이 분기해 나온 때는 꽃식물이 등장할 즈음이다. 2006년 미얀마에서 발견된 백악기 중기 호박 속의 1억 년 전 꿀벌 화석이 그 증거다.
인간이 등장하기 전부터 꿀벌은 이리저리 꽃가루를 옮기며 식물의 수정을 매개하는 곤충으로 일찌감치 자리 잡았다. 많게는 6만 마리에 이르는 거대 집단을 이루어 살아가는 꿀벌은 밀랍으로 집을 지어 꿀을 저장하고 새끼를 키운다. 꿀벌은 그 어떤 종보다 영양이 풍부한 자원을 저장한다. 포식자들이 그 보물을 그냥 지나칠 리 없다. 이에 꿀벌은 포식자에 맞서, 박히면 좀처럼 빠지지 않는 미늘 같은 침을 피부에 박아 거기에 독을 밀어 넣는 방법을 터득했다. 하지만 침에 쏘여도 여간해서 죽지 않는 인간은 일찌감치 꿀벌을 인간 집단 안으로 들여와 길들였다. 바람을 타고 수정하는 곡물 몇 가지를 제외하면 대부분 과실은 꿀벌의 도움을 받아 열매를 맺는다. 산수유도 마찬가지다.
태양의 리듬에 맞춰 나른한 아지랑이가 하늘로 솟을 때면, 변온성인 꿀벌은 따스한 햇볕 덕에 근육에 힘을 잔뜩 넣고 분주히 날갯짓을 한다. 전남 구례의 축제에서 산수유의 여리고 노란 꽃을 무심코 보았던 적이 언제던가? 우리는 지난 두 해 봄을 코로나 팬데믹에 고스란히 헌납했다. 그렇다고 다가올 세 번째 봄에 대한 불안감이 완전히 가신 것도 아니다. 눈을 돌려 보면 어느 하나 그냥 만들어진 것들이 없다. 생태계 속에서 어울려 살아가면서 양보하고 조율하며, 수만 년의 시간과 공력을 들여 만든 것들이다. 무심코 눈에 들어오는 작은 풍광도 너무나 많은 우연이 필연적인 조건으로 작용함으로써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그래서 소중하다. 얼마 전 산불로 소실된 우리 산천에 또다시 꽃과 벌이 조화를 이루기까지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상념이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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