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지역 주민을 만나는 프로젝트를 맡아 진행했다. 지역 공동체를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노력하는 이들을 만나는 건 표면적으로는 무척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창 바쁜 시기에 주어진 과업은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저 별 탈 없이 프로젝트를 잘 마무리하는 게 가장 큰 목표였다.

몇몇 분의 도움을 받아 지역에서 30년 넘게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어르신 한 분과 연이 닿았다. 어르신은 환한 미소와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더 나아가 함께 봉사활동을 하는 다른 주민분들을 추천해주었다. 덕분에 지역과 별다른 연계가 없던 상황에서 ‘자원봉사’라는 주제로 여러 주민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고, 이를 바탕으로 책자를 만들어 프로젝트를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업무적인 관계를 넘어 인간적인 관계로 이어질 수 있도록 먼저 손을 내민 건 주민분들이었다. 이들은 식사를 대접하는 것도 모자라 우리에게 거듭 감사의 인사를 표현했다. 오랜 기간 봉사활동을 해도 가끔 상을 받는 게 전부지,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책자가 나오는 건 처음이라 했다.

회사 입장에서는 여러 영리 활동 중 하나였지만, 지역 주민분들에게는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가 책에 실리는 소중하고 특별한 경험이었다. 그것은 그 어떤 경제적 보상 없이 타인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마땅히 지불했으며, 우리 사회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몫을 개인의 차원에서 꾸준히 해온 것에 대한 자그마한 보상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이들의 값진 이야기를 어떤 형태로 가공해서 세상 밖에 내놓을 것인가 고민하는 건 무척 중요한 문제였다. 그럼에도 일정이 빠듯하다는 이유로 이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가공하지 못한 건 아닐까, 뒤늦게 아쉬움이 밀려왔다.

돌이켜보면 책 만드는 일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어떤 책을 기획할 것인가 고민하는 과정에서 늘 ‘최초의 책’이라는 타이틀에 집착했다. 이것은 새내기 편집자에게는 생존의 전략이기도 했다.

방과후강사의 이야기를 담은 최초의 책, 현장실습생 당사자의 이야기를 담은 최초의 책, 축산업에서 살아남은 동물을 다룬 최초의 책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기획했지만, 목소리를 담아내는 걸 넘어 그 이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했는가에 대해선 아쉬움이 많았다.

‘최초의 책’은 홍보 문구로 쓰기엔 좋았지만 콘텐츠의 형태와 깊이에 대한 성찰은 가렸다. 책을 기획할수록 뿌듯함과 만족감 대신, 좋은 소스를 가지고도 제대로 가공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커졌다. 이것은 단순히 편집자의 역량 부족을 넘어, 사회 문제를 다루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기본적인 자세가 부족했음을 의미했다.

고고학은 물질적인 흔적을 바탕으로 연구와 해석을 통해 과거를 재구성하는 학문이다. 고고학자들은 일반인의 눈에 바닥에 흔히 굴러다니는 돌조각쯤으로 비치는 물건에서,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의 표현에 따르면 ‘구석기 시대의 스마트폰’이라 할 수 있는 ‘주먹도끼’를 발견한다. 자그마한 토기 조각 하나에서 고대 국가와 민족의 활동 반경을 가늠해보고, 희미하게 남은 집터를 통해 과거의 건축 양식을 추정한다. 동일한 걸 발견하더라도 발견 주체의 학문적 깊이 혹은 경험의 정도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수십만 년 동안 그래왔듯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조각으로 남을지, 한 시대를 대표하는 도구가 될지는 그것을 목격하는 이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의미다.

창작의 차원이 아닌 가공과 해석의 차원이며, 날 것을 가공해 세상에 선보이는 매개의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편집자가 하는 일은 고고학자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학문적으로 깊고 경험이 풍부한 고고학자가 더 의미 있는 유물을 발굴하듯이, 편집자 역시 자신이 발굴하고자 하는 콘텐츠에 대한 공부가 필수적이다. 또한 단순한 공부 차원을 넘어, 좋은 재료로 형편없는 음식을 만들지 않도록 과정 하나하나에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만 한다. 이는 편집자와 고고학자만의 고민을 넘어, 발굴하는 일을 업으로 삼은 이들이 감당해야 할 책임이자 의무이며 발굴가에게 필요한 자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