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투표 날짜를 착각했다. 무슨 정신이었던 건지, 주말 이틀 동안이 사전투표일이라 생각한 것이다. 나는 하루 종일 개인 일정을 처리하고 토요일 오후 6시가 다 되어서야 날짜를 착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지도 앱을 켰다가 그곳에 올라온 사전투표 공지사항을 보고서였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잠시 멍하니 있었다. 나 자신이 나름대로 정치 이슈나 시민의 권리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어느 때보다 온 세상이 대선으로 시끌벅적하고, 여기저기 사전투표 일정이 대문짝만하게 붙어있는데, 그 날짜를 착각했다는 게 무척이나 바보같이 느껴졌다.

‘바보 같다’고 하니 떠오르는 일화가 있다. 스무 살이 되고 처음 맞이했던 제 20대 국회의원 선거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아서, 동기들이 모인 단톡방이 남아 있었다. 당시의 나는 첫 번째 선거에 대한 기대나 의무감 같은 게 있던 건지, 단톡방에 ‘오늘 꼭 투표하자’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특정 정당을 지지하거나 응원하는 글은 아니었다.

그런데 한 친구로부터 예상치 못한 답변이 왔다. 비속어가 섞여 그대로 옮길 수는 없지만, 대략 ‘똑똑한 척하지 마라’는 식의 메시지였다. 나에게 개인적으로 보낸 것이 아니었기에 다른 친구들도 우리의 대화를 확인했고, 이를 장난으로 수습해보려는 메시지가 연달아 올라왔다.

하지만 어떻게든 분위기를 완화해보려는 이들과는 달리 그는 꿋꿋하게 욕설을 계속했다. ‘똑똑한 척하지 마라’로 시작된 그의 이야기는 어느새 ‘우리가 바보인 줄 아느냐’로 이어졌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맥락 없는 그의 태도에 화가 나기도 했지만, 이내 괜한 답변을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휴대전화를 멀리 던져버렸다.

벌써 5년도 더 지난 이야기다. 그 뒤로 그의 소식을 전해 들은 적도 없고, 여전히 그가 왜 나에게 그런 식으로 대답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아주 조금 알게 된 것이 있는데, 바로 ‘정치’에는 일종의 ‘거만함’이 배어 있다는 사실이다.

양복을 갖춰 입은 채 법과 제도, 정책과 사회문제에 대해 토론하는 정치인들의 모습은 익숙하면서도 그 내용은 굉장히 낯설다. 사전지식이 없다면 규칙을 전혀 모르는 스포츠 경기를 보는 기분마저 든다. 집으로 배달되는 선거 공보물도 마찬가지다. 바르고 정제된 언어가 제시하는 방향은 당장 눈 앞에 펼쳐진 나의 삶과 일치되지 않는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렸는지도 혼란스럽다.

내 삶은 달라지지 않는데, 세상은 끊임없이 더 거대한 문제가 있다며 날마다 소리를 지른다. 마치 나의 문제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럴수록 자신의 문제에만 골몰하는 스스로가 어리석고 한심한 인간처럼 느껴진다. 저들만의 규칙으로 경기하는 이들도, 그 경기에 열광하는 이들에게도 화가 난다. 솔직히 나도 한 번쯤은 소리를 지르고 싶은 순간이 있다. ‘똑똑한 척하지 마라’거나, ‘우리가 바보인 줄 아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이 있다. 바로 우리 자신이 경기의 관중이 아닌 참여자라는 것이다. 길게 말할 것도 없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정치에 관심을 가진다고 똑똑한 것도 아니고, 관심의 유무와 관계없이 우리가 행사하는 한 표의 가치는 동등하다. 선거일 기준 18세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라도 선거권을 가진다.

그렇기에 ‘우리를 바보 취급한다’는 생각과는 달리, 선거는 오히려 바보들의 잔치가 된다. 사회에서 무시 받고 주요 담론에서 제외되었던 사람들이, 정치권의 언어가 대변하지 못한 욕망들이 끊임없이 움직이며 들끓는다. 누군가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손가락질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에게도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라는 스포츠의 가장 중요한 규칙이다.

그러니 이번에는 욕먹을 각오를 단단히 하고 말하겠다. 아직 투표를 하지 않았다면, 혹 나처럼 사전투표 날짜를 착각한 사람이 있다면, 3월 9일에는 꼭 투표소를 찾아가자. 우리 ‘꼭 투표하자’. 서로가 이해하지 못하는, 쉽사리 드러내지 못했던 각자의 욕망을 그곳에서 맘껏 소리치자. 아무리 바보 같은 선택이라도, 자신의 권리를 던져버리는 일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