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얀 페르메이르가 그린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북유럽의 모나리자’라고 불리는 명작이다. 아랍풍의 이국적인 터번을 머리에 쓴 소녀는 누군가를 응시하기 위해 왼쪽 어깨를 틀고 고개를 돌려 매혹적인 눈길을 보낸다. 큰 눈동자와 관능적인 입술, 야릇한 표정과 시선이 신비감을 준다. 그런데 제목과 달리 귀걸이는 단번에 들어오지 않는다. 첫눈에 띄는 것은 파란색 터번이다. 당시 파란색은 구하기 어려운 특별한 색이었다. 머나먼 아프가니스탄에서 채굴된 청금석을 갈아 얻었는데 울트라마린이라고 한다. 유럽에 수입된 울트라마린은 금과 같은 가치를 지닐 만큼 귀했다.

그림= 서상균 기자

고대부터 가격이 비싼 색으로 보라색이 유명했다. 보라색은 자연에서 얻기가 힘들다. 오직 지중해 동쪽 해안 페니키아의 도시 티레(Tyre)에서 서식하는 뿔고둥에서만 생산됐다. 이것을 티리언 퍼플(Tyrian purple)이라고 한다. 뿔고둥은 바다 우렁이의 일종인데 한 마리에서 단지 보라색 한 방울을 얻을 수 있었다. 옷감 염색을 위해 30㎖의 보라색 염료를 얻으려면 무려 25만 마리나 되는 뿔고둥이 필요했다. 자연에서 기원한 염료는 발견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제조법이 복잡하고 노동력이 많이 들어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쌌다. 그래서 오랜 기간 인류는 무채색에 만족하고 살아야 했다.

색깔의 혁신은 19세기에 일어났다. 말라리아 치료제 퀴닌을 개발하려는 과정에서 우연히 인공염료가 발견된 것이다. 제국주의 세력이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로 팽창하면서 만난 복병이 말라리아다. 유일한 치료제는 안데스 고산지대에서 재배한 키나 나무의 껍질 키나피였다. 남미 국가들이 키나피를 독점하고 수출을 제한해 가격이 치솟았다. 19세기 중반 퀴닌을 인공적으로 합성하려는 시도가 일어났다. 영국의 윌리엄 퍼킨(1838~1907)은 말라리아 약 개발에는 실패했지만, 석탄의 부산물 콜타르에서 보라색 인공염료를 발견했다. 값싼 콜타르에서 보라색 염료를 생산해 가격이 저렴해지자 섬유업계에 돌풍이 일었다.

보라색에서 시작한 혁신은 파란색에도 파급됐다. 당시 파란색은 인도에서 생산되는 ‘인디고페라’라는 콩과식물에서 만들었다. 인디고(indigo)는 남색 혹은 쪽빛을 의미하는데 ‘인도에서 왔다’는 뜻을 가진다. 1878년 독일 화학자 아돌프 폰 베이어는 콜타르에서 인디고를 합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로 인해 독일 화학회사는 아주 낮은 가격에 인디고를 생산해 공급할 수 있었다.

독일 화학산업은 바스프 훽스트 바이엘 3개 회사가 중심이 돼 발전했다. 1863년 설립된 제약회사 바이엘의 창업자 프리드리히 바이엘은 원래 비단 상인이었다. 그는 값싼 염료를 만들어 옷감을 염색해 판매했다. 수익 대부분을 연구개발비로 투자해 주식회사로 성장한 바이엘은 1888년 중대한 발견을 한다. 콜타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페나세틴이라는 해열진통제를 만든 것이다.

페나세틴은 현재 널리 사용되는 타이레놀의 원조가 되는 약이다. 이 약은 대박을 터트렸다. 1889~1892년 독감이 세계적으로 유행하자 해열진통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열이 나고 몸살이 심해지면 페나세틴을 먹었다. 나중에 신장 부작용이 발견돼 퇴출당했지만, 페나세틴은 바이엘이 황금알을 낳는 제약산업으로 이행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뒤이어 아스피린을 개발하면서 바이엘은 거대 기업이 됐다. 기존 진통제와 비교해 속 쓰림이 적은 아스피린은 세계를 휩쓸었다. 머리가 아프고 열이 날 때 아스피린 1알만 삼키면 고통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염료는 유기화합물을 정밀하게 합성하는 제약산업으로 진화했다.

색깔 있는 옷을 입고 싶다는 욕망이 신약을 탄생시켰듯이 현재 추구하는 것이 훗날 무엇으로 바뀔지 알지 못한다. 오미크론으로 어려움을 겪지만 백신 치료제에 대한 투자가 나중에 엄청난 기회로 돌아올 수 있다. 오늘 그리는 그림이 길이 남는 명화로 변신하게 되는 소망을 가지고 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