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끝이 보이는 2월의 오후, 따뜻한 햇살을 골라 길을 나선다. 냇가를 따라 잘 정비된 산책길에는 사람들이 여럿이다. 운동기구에서 땀 흘리는 중년의 아저씨, 털모자를 쓰고 벤치에 앉아 해바라기 중인 할머니 몇 분, 배낭을 메고 산에서 내려오는 등산객, 함께 산책 중인 강아지와 아줌마, 내가 산책길에서 자주 만나는 반가운 얼굴들이다.
조금 두터워진 햇살 덕분인지 오늘은 유모차도 보인다. 유모차 안의 아기가 보고 싶어 내 걸음이 빨라진다. 아, 그런데 유모차에는 아기가 아니라 흰털이 예쁜 강아지가 타고 있다. 요즘은 강아지 유모차를 쉽게 만난다. 몇 년 전 유모차에 타고 있는 강아지를 처음 보았을 때는 충격이었지만 이제 일상이 되었다. 아기 유모차와 강아지 유모차를 구별할 때도 되었건만 그렇지 못한 것은 유모차는 아기가 탄다는 고정관념과 아기가 타고 있으면 좋겠다는 나의 바람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해바라기 중인 할머니 옆에도 빈 유모차가 한 대 있다.
‘유모차’의 사전적 의미는 ‘어린아이를 태워 밀고 다니는 작은 수레’이다. 그런 유모차가 참 많이 변해 왔다. 몇십 년 전, 첫째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집안 정리를 끝낸 11시에 어김없이 산책을 갔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세 명 모두 유모차와 함께였다. 그러니까 우리는 산책길에 나타나는 ‘유모차 부대’였다. 집안일에 지친 우리 스스로에게 휴식을 주고 아이들에게도 신선한 공기와 따듯한 햇살을 만나게 해주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때 풀어놓았던 수많은 수다가 지금도 그 산책길 나무들에 조롱조롱 매달려 있다. 유모차가 있어 우리의 산책이 가능했다. 물론 병원을 갈 때도 동네 시장을 갈 때도 유모차와 함께였다. 아이가 커서 혼자 잘 걸을 때까지 유모차는 늘 우리와 함께였다. 유모차가 있어 힘 덜 들이고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었다. 내가 살던 신도시에는 젊은 엄마들이 많아 유독 유모차가 많았다. 오후 4, 5시께에는 장을 보러 나온 ‘유모차 부대’가 동네를 채울 정도였다.
우리 아이들이 커서 유모차가 필요 없을 그 무렵부터 서서히 유모차를 미는 젊은 엄마 대신 할머니가 유모차를 미는 경우가 늘어났다. 맞벌이 부부가 점점 늘어나자 할머니가 육아를 담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유모차에도 사회현상이 반영된 것이다.
“앞장선 유모차가 노모를 끌고 간다/아이를 실었다가 짐 꾸러미 실었다가/노모를 태운 유모차 숨이 차는 오르막//활처럼 휜 저 등에 지고 나른 수많은 짐/뼈마디 녹여가며 가던 길 따라가면/아이 적 그 요람까지 다다를 수 있을까”(정애경의 시조 ‘요람까지’)
손주를 태우고 유모차를 밀던 할머니들, 그 할머니들이 이제는 빈 유모차에 의지한다. 할머니들은 아이 대신 세월을 천천히 밀고 간다. 할머니 유모차라고도 불리는 노인보행기는 집안에 필요 없어진 낡은 유모차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아이 대신 물건을 싣고, 지팡이 대신 의지해 걷기에 빈 유모차는 안성맞춤이다. 거기에 착안해 잠시 앉을 수 있는 의자 형태가 곁들여진 지금의 노인보행기가 탄생했을 것이다. 유모차 형태의 노인보행기를 사용하는 할머니는 많아도 할아버지는 드문 것도 유모차 형태 때문일 것이다. 노인 인구의 급증은 할머니 유모차의 증가를 가져왔다.
유모차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강아지 유모차로 변화했다. 반려견을 키우지 않는 입장에서는 처음에는 의아했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반려견이 많이 늙어 걷기가 힘들거나 혹은 아프거나 하는 사정이 있을 것이다. 잘 걷는 큰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지 않듯이 걷고 뛰고 싶어 하는 개를 단지 견주의 욕심으로 유모차에 태우는 일은 없을 것이라 믿는다. 강아지 유모차의 등장은 그만큼 반려견의 수가 많아진 사회현상의 반영이고 한편으로는 개를 애완견에서 반려견으로 받아들인다는 긍정적인 의미이다.
할머니 유모차도 강아지 유모차도 좋다. 어쩌면 유모차는 또 다른 기능과 모습으로 변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산책길에 그런 유모차 못지않게 아기가 탄 유모차를 더 많이 만나고 싶다. 유모차 속의 햇살 닮은 아기 웃음을 더 자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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