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난장] 갈등 공화국에서 공감의 힘 /권명환

계층·세대·지역·젠더 등 나날이 치솟는 갈등 수위

삶은 복잡한 관계로 연결, 공감과 소통의 자세 필요

권명환 해동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과장
| 입력 : 2022-01-20 19:36:25
| 본지 19면

2022년 대한민국은 코로나 시국의 힘겨움에 더해 다양한 갈등으로 몸살을 앓는다. 계층갈등 세대갈등 지역갈등 젠더갈등까지 ‘갈등 공화국’이라 할 만큼 갈등의 수준과 범위 역시 확대되고 있다. 특히 올해 대선을 앞두고 사람들은 증오와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며 갈등이 격화된다. 자신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굳게 믿으며 날카로운 말을 공격적으로 쏟아낸다. 저마다의 정의를 집요하게 밀어붙이는 갈등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건 없을까?

생각나는 일화가 있다. 영어 외엔 의사소통이 전혀 안 되는 외국인을 진료했던 경험. 내가 영어회화에 서툴러 능숙한 다른 선생님을 추천했는데 굳이 여기에서 치료받고 싶단다. 본인이 오겠다고 우기는데 어쩌겠는가. 약 처방에는 어려움이 없지만 증상만 알아듣는 수준이어서 이렇게 상담을 해도 되나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상대의 표정과 시선, 호흡이나 목소리, 몸동작에 집중하고 반응하는 게 전부였다. 아, 끄덕, 음…. 추임새를 넣으며 표정에서 감정선을 따라가려 애썼다. 말이 빠르고 더군다나 영어 사투리가 심해서(그렇게 믿고 싶다) 무슨 말을 하는지 거의 못 알아들었지만 감정을 따라 공감을 표시하는 건 가능했다.

몇 개월의 시간이 흘러 치료가 종결되었다. 이제 부담감에서 해방되나 싶었는데 이분이 뒤통수를 친다. 외국인 친구 두 명을 소개하고 싶다고, 상담의 퀄리티가 높아 만족스럽다고 말한다. 퀄리티는 개뿔, 대화는 주고받는 건데, 구체적인 상황 파악도 못하는데 무슨 상담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것 하나는 정확히 이해했다. 그분이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운지, 절실한 마음을 전하며 공감을 바라는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말을 하고 싶어 한다. 사나운 말이 힘을 얻는 세상에서 작고 연약한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비록 잘 들어주는 거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조언이나 내 생각을 앞세우기보다, 그저 반응하고 공감하며 경청하는 게 도움이 된 것이다.

언젠가부터 정의를 분명하게 외치는 사람들을 경계한다. 선명한 정의는 우리의 환상에 가깝지 않을까? 정의롭지 못한 현실은 구체적이지만 정의로운 현실은 언제나 애매모호하다. 왜냐하면 정의롭지 않은 생생한 현실이 정의의 지점을 끊임없이 재설정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의 정의를 강요하는 압력은 정의의 강박, 나아가 정의의 도착증이라고 생각한다. 자신만이 정의라고 집단으로 믿어버리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서로 다른 관계의 네트워크에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 정의의 사도끼리 만나도 어느 한쪽은 정의롭지 못하고 손해를 보는 게 우리가 사는 세상에선 필연적이다. 나의 정의로운 행위가 상대엔 뾰족한 폭력으로 돌변할 수 있다. 그래서 정의는 상대에 대한 공감을 담아야 하고, 사랑 없는 정의는 공허하다.

죽음을 앞둔 사람을 종종 만난다. 그들의 마지막 눈물 한 방울이 자신을 위한 거라면 나머지 아홉은 남겨질 사람을 위한 걱정이었다. 식탁에 숟가락 하나 사라질 뿐인데, 식기 전에 밥이라도 마음 편히 먹을까 남겨질 사람을 먼저 챙긴다. 상대를 향한 공감과 사랑은 그런 것이다.

공감만으로 세상의 모든 갈등에 맞설 수 없을지라도 낯선 타인에 공감의 파이프라인을 연결하는 태도는, 사랑의 관계로 진입하는 첩경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라는 유대로 전진하는 모험이며 정의가 비로소 세계에 꽃피우는 자리다.

우리의 정서적 뇌는 정답을 갖고 문제를 푸는 오류를 종종 범한다. 더군다나 나의 확신을 부정해야 하는 성찰의 순간은 심리적으로 무척 불편하다. 갈등이 격화되면 나만이 옳다는 확증편향에 기름을 붓고 자신의 편에 ‘좋아요’만 반복해서 누르며 정의의 근거가 되는 땔감을 모은다. 하지만 불이 나면 우리 모두 타버리고 정의마저 한 줌의 재로 사라진다. 페르시아 시의 한 구절. ‘인류는 하나의 몸과 같은 것, 한 사람의 고통으로 다른 사람들은 평화롭지 않을 것이니’.

영어로 자유롭게 말할 수 없었던 나는 외국인과 그 긴 시간 동안 무엇을 했던 것일까? 비언어적 의사소통으로 공감을 나누었던 것 같다. 원시시대에는 자연과 얘기를 나누고 사상가 발터 벤야민은 도시에 굴러다니는 돌과, 시인 보들레르는 하늘의 구름과 소통했다. 그 경지까진 아니어도, 비언어적 소통은 우리가 말 못하는 아이와 흔히 하던 공감 방식이 아닌가. 저마다 정의를 부르짖는 갈등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경청하는 자세와 공감이 아닐까.

외국인에게 소개는 고맙지만 정중히 사양하겠노라 말하고 안녕을 고했다. 발걸음 총총, 앞날을 향한 그의 발걸음이 안녕하길 바란다. 이제 사연 모를 그의 고통과 감정을 떠나보낼 시간이다. 사람이 말을 할 수 있는 건 서로 간의 오해 때문이고, 어차피 상대를 완전히 이해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그의 입장이 되는 경험만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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