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를 앞두고 호텔들이 저마다 ‘호캉스’ 상품을 출시해 홍보 중이다. 코로나로 불황이 아닐까 싶었는데, 해외로 가지 못하는 이들이 국내 호텔로 몰리는 바람에 인기가 뜨겁다고 한다. 나도 이즈음이면 최저가 항공권을 찾기 위해 열을 올린다.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모님이 계신 제주도에 가기 위해서다.

고향이 제주도라고 하면 사람들은 나를 부러워한다. ‘제주도의 푸른 밤’ 노래처럼, ‘모든 걸 훌훌 버리고’ 떠나 즐기는 낭만적인 순간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가족은 아직까지 제주도 호텔에서 휴양을 해본 적이 없다. 부모님에게 제주도는 삶의 터전이고 노동의 공간이다. 이번 설에도 부모님은 마음 편히 쉬지 못하고 일터로 향할 것이다.

최근 읽은 소설 ‘호텔 해운대’(오선영)는 마치 내 이야기인 양 반가운 단편 작품이었다. 소설 속 주인공 수정은 부산에 살지만 한 번도 부산의 호텔에 묵은 적 없는 28살 사회초년생이다. 그녀는 이벤트에 당첨되어 호텔 숙박권을 받게 되고, 설레는 마음으로 공시생 민우와의 호캉스를 준비한다. 그러나 체크인할 때부터 난관에 부딪힌다. 세금과 봉사료는 개별 부담이라는 사실을 미처 몰랐던 탓이다. 둘은 일주일 치 점심값과 맞먹는 금액을 지불하고 우여곡절의 하룻밤을 보낸다. 그리고 체크아웃을 앞둔 시각, 수정은 테라스에 꼼짝 않고 선 민우를 발견한다. 다시는 오지 못할 고층 객실에서 드넓은 바다를 내려다보는 민우의 눈동자. 이 순간 그의 가슴속에 몰아치는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호텔 해운대’를 읽고 나니, 약 10년 전 발표된 소설 ‘프라자 호텔’(김미월)이 떠올랐다. 이 작품에선 휴가철마다 서울의 5성급 호텔을 찾아다니는 30대 부부가 주인공이다. 프라자 호텔에 도착한 ‘나’는 불현듯 십여 년 전 같은 호텔에 온 적이 있음을 깨닫는다. 갓 시골에서 상경한 대학생 시절, 좋아하는 여학생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서 호텔 숙박비를 모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호텔에 나타나지 않았고, ‘나’만 객실에서 밤새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았다. 그때와 비교해 지금의 ‘나’는 다른 존재가 된 듯하다. ‘나’는 돈으로 완벽을 살 수 있음에 만족하는 어른이 되어 호텔 밖을 무심히 내려다본다. 지금의 ‘나’에겐 시청 광장의 시위도 매일 반복되는 지루한 풍경들 중 하나로 느껴질 뿐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호텔 해운대’ 속 공시생 민우도 십여 년이 흐른 뒤에는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어른이 될까? 수정은 자신들의 미래를 이렇게 짐작한다. “민우가 행정직 9급 공무원이 되어도 5성급 호텔에 편하게 올 수는 없을 것이다. (…) 우리가 쥘 수 있는 건 서로의 마른 손이지 호텔 카드키가 아닐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구성원으로 적응해 나가기는커녕 생존조차 버거운 시대에 도달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나는 작년 여름까지 송도해수욕장 인근에 살았다. 처음 자취를 시작했던 7, 8년 전만 해도 한적했던 동네는 재개발로 많이 달라졌다. 낡은 건물을 허물고 고층 아파트와 호텔을 세우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해가 저문 뒤 바닷가를 거닐다 미끈한 호텔 건물 객실에 노란 불빛이 켜진 것을 볼 때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드는 생각이 있었다. 나도 언젠가는 저런 숙소에서 하룻밤 머물며 여유를 즐길 수 있을까. 한 달 월세를 걱정하지 않고 취향에 맞는 객실을 고르는 삶이 과연 나에게도 오기는 올까.

‘떠나요, 둘이서~’로 시작하는 ‘제주도 푸른밤’ 첫 소절은 유명하다. 그러나 다음 가사는 무척 생경하게 느껴진다.

‘이제는 더 이상 얽매이긴 우리 싫어요. 신문에 티비에 월급 봉투에’.

월급 봉투에 얽매이지 않고 제주도로 떠나는 것이 낭만이라면, 도시 호텔에서의 휴식을 위해 월급을 아껴 모아야 하는 상황은 대체 무어라 불러야 할까. 체크인까지의 거리도 멀지만, 깜짝 선물처럼 호텔 숙박권이 주어진다 한들 체크아웃 이후의 삶도 아득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