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마을을 취재한 지 이태째다. 이동이 불편한 시기지만 발품 팔아 옛집을 만나는 보람은 크다. 개실 개평 남사촌 무섬 양동 인량 한개 황산마을…. 이들 옛 마을은 대부분 영남권에 분포했다. 양동마을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유서 깊은 마을이고, 여타 마을 입향조 역사도 몇백 년인 집성촌이다. 대개 길지에 자리한 이들 마을은 풍수지리를 모르더라도 보기에 푸근하다. 집과 집을 잇는 토석담과 돌담길도 향촌 정서를 간직했다.

고택을 보는 안목도 틘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며 만나는 건축물은 안채가 아니고 사랑채라는 걸, 사랑채가 서원과 재실도 겸했던 점을, 사랑채 누각을 장식한 나무 문양의 아름다움을 알게 됐다. 안채로 들어서면 행랑채와 곳간이 마당을 사이로 적절히 놓인 여유도 보인다.

고택에 들를 때 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 있다. 잊고 나오면 헛걸음한 듯 심산하기까지 하다. 그것은 안채 높직한 마루나 행랑채 나지막한 마루에 앉아보는 일이다. 고택과 교감하는 의식이랄까. 눈썹마루나 쪽마루 또는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마당에 드리운 처마 그림자에, 멋스러운 현판 글씨에, 촘촘하게 무늬 짠 창호 문살의 정교함에 감탄한다. 명문 반가에 얽힌 바깥 세상사까지 목도했을 묵묵한 기둥도 쓰다듬어 본다. 대대손손 발길에 밟혀 모서리가 닳아먹은 섬돌은 더 애틋하다.

요즘 종가에는 그 후손이 들어와 사는 데가 많다. 대체로 도시에서 직업을 갖고 살다가 은퇴하고 귀향해 사는 경우다. 하여,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사진을 찍어대는 객이 달갑지 않다. 이런 불편을 무릅쓰고 대문을 개방하는 집도 있다. 이럴 때는 둘러보는 걸음이 오히려 조심스럽다. 종가 맏며느리인 종부도 세대교체했다. 윗 세대가 물러나고 예순을 전후한 연령대가 안주인으로 들어앉았다. 이들도 다른 마을 종택을 탐방한다. 그들은 옛집을 어떻게 가꾸고 관리하며 보존하는가를 살핀다고. 대문이 잠겨 헛걸음할 때 크게 아쉽더란다. 해서 언제든 방문하라고, 항상 대문을 열어놓는다는 의령 탐진안씨 종택의 종부가 한 말이 또렷하게 남아있다.

최근 방문지는 남도다. 보성 강골, 장흥 방촌, 영암 구림마을…. 작정하고 먼 길을 나설 때 한 가닥 파고드는 아쉬움을 떨칠 수 없다. 부산에는 왜 전통마을이 없을까. 한국전쟁 때 들이닥친 피란민으로 방 한 칸이라도 더 내어야 했기 때문인지. 해풍에 직면한 환경에 나무 소재 가옥이 실용적이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전쟁을 치르고 재건하는 과정에 양옥건물로 다 바뀐 건지…. 아무튼 문화마을로 불리는 감천마을이나 흰여울마을, 첫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아미동 비석마을까지, 도시의 옛 마을이라도 있어 다행이다. 이들은 고풍과는 거리가 있다. 하나 지나간 삶을 엿보기에 그 역할을 다한다.

이와 함께 부산에는 전통시장이 제법 존재한다. 조선시대 때부터 한국전쟁을 전후해 자연 형성된 시장이다. 가 본 큰 규모의 재래시장만 해도 금세 열 손가락을 꼽는다. 부평깡통시장부터 국제, 자갈치, 부산진, 부전, 구포, 수영 팔도, 인근 동래까지…. 여행도 자유롭지 못한 요즘, 친구와 수다를 떨고 싶을 때 카페가 아닌 시장에서 만났다. 그곳에서 구경하고 노닥거렸다. 딱히 갈 곳 없고 무료할 때 가던 시장, 어느 때고 편하게 들락거리던 지난날이 그리운 시절이다. 이슬 머금은 채소 다발을 이고 이십 리 산길을 걸어 오일장에 가던 어머니가 생각나는 곳. 재래시장은 그때의 향수를 찾아가는 장소다. 북촌한옥마을이나 전주한옥마을 같은 부산한옥마을은 없지만, 어쩌겠는가. 문화마을이라도 본디의 모습을 유지하기를, 전통 재래시장도 그 명맥이 이어지기를 바랄 뿐.

기술만이 아니라 문화와 관습까지도 급변하는 세태다. 흐름을 따라잡기도 벅찰 때 푸근한 전통의 정서가 그립다. 그 정서란 고리타분한 구닥다리가 아닌 따뜻한 고전이다. 앞다투어 내닫기만 하더라도 잠깐 온고지신의 쉼표를 찍어봄은 어떨까. 고택 인심은 따뜻했다. 커피를 내주고, 텃밭에서 쌈배추를 뽑아주고, 대봉감 홍시도 아낌없이 담아준다. 전통마을엔 인정도 전통처럼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