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에서 우연히 큰딸의 이름이 적힌 동화책을 발견했다. 스페인 작가 에밀리오 파스쿠알이 쓴 ‘동방박사의 선물(Dias de Reyes Magos)’이다. 우리 아이들이 크리스마스 때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듯 스페인 아이들은 동방박사의 선물을 기다린다. 하지만 이 동화의 주인공인 울리는 여덟 살 때 동방박사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는 당혹스럽고 버림받은 느낌이었다. 기분이 씁쓸했다’고 했다. 그리고 “동방박사가 사라지자 다른 것도 모습을 감추었다. 이를테면 손길처럼 부드러웠던 노랫가락 같은 것도. 그 가락은 언젠가 요람에 누운 나를 감싸주곤 했는데, 어느 날인가부터 아버지는 두 번 다시 그 가락을 휘파람으로 불지 않았다.” 모든 것이 심드렁한 상황에 부모님 사이가 나빠지고, 마침내 울리는 열여섯 살이 되던 날, 집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의 말마따나 ‘문을 쾅 닫고 떠나 버리기는 쉽다. 어디로 갈지 정하는 것이 더 힘들어서 그렇지.’ 그는 ‘칼리’라는 여자친구에게 의지한다. 그리고 울리는 학교에 가는 대신 지하철역으로 발을 옮긴다. ‘언젠가 아버지가 영감이 떠올랐을 때 큰 도시의 지하철역은 고대 사람들의 밀림과 같다’고 말한 기억을 떠올린다. 거기서 울리는 채식주의자이며, 정치인을 능멸하는 광대인 아버지를 장님의 모습으로 만난다. 그리고 그들의 문학 오디세이가 시작된다. 올리는 장님의 길 안내인으로, 그리고 책을 읽어주는 일을 한다. 그리고 매일 우편함에는 자신의 이름으로 보내온 책들을 받게 된다. 그는 칼리의 선물이라 여겼지만, 실은 아버지의 선물이었다. 칼리는 혹시 동방박사의 선물이 아닐까 하며 능청을 떤다.

마침내 울리는 열쇠 세 개가 든 선물을 받게 된다. 거기엔 주소까지 적혀 있고, 지금까지의 미스터리를 한꺼번에 깨닫게 할 다락방이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아버지 엄마 칼리 그리고 문학 선생님이 함께 꾸민 일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아버지는 지하철에서 세상을 뜬다. 아버지가 미리 구상해 놓은 소설 한 대목처럼 ‘지하철은 그를 집어삼켰다’.

가톨릭교회는 매년 1월 6일을 즈음하여 ‘주님공현대축일’(epiphany)을 기념한다. 공현(公現)은 동방박사들이 황금과 유향 그리고 몰약을 아기 예수에게 선물하며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의 공적 출현을 의미하는 말이다. ‘epiphany’는 라틴어 epi-(on, to)와 phainein(to show)이 결합한 말이다. 확장된 의미로는 ‘사실이나 참된 뜻의 직각(直覺) 또는 통찰’을 의미한다.

시인을 유일하게 가치 있는 직업으로 여기는 울리의 아버지는 채식주의를 하는 자신만의 철학을 내세워 이렇게 말한다.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죄 없는 돼지를 잡아먹을 권리가 있다면 텔레비전에 지겹게 나오는 정치인들이야말로 못 잡아먹을 이유가 없다고 했다. (중략) 정치가 그럴싸한 수법으로 국민을 속이고, 빼앗고, 등골을 뽑기만 하고, 선거에서 부르짖은 약속을 전혀 지키지 않는 게 하나의 기술이 되어 버렸다고 했다.”

그의 일갈은 궁색한 변명이기는커녕 오늘의 정치를 지켜보는 우리에게 웅변으로 다가온다. 울리의 아버지가 젊었을 때 스페인은 독재자 프랑코의 통치하에 있었으니 말이다.

대통령 선거를 50여 일 남겨두고 있다. 철학자 김진영이 쓴 ‘아침의 피아노-철학자 김진영의 애도 일기’를 읽어본다. 그는 임종 3일 전 섬망이 오기 직전까지 이 글을 썼다고 한다.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를 번역한 학자답게 자신의 죽음도 애도하고, ‘비슷하거나 또 다른 방식으로 존재의 위기에 처한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성찰과 위안의 독서가 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글을 써나갔음을 ‘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다.

과연 그는 시한부의 삶을 살면서 왜 잠들 때마다 노무현 대통령의 유튜브를 틀어 놓았으며, 이정희 의원의 연설에 나오는 우리 꿈 사랑이라는 단어들에 집착했을까? 그리고 왜 첼로를 켜는 노회찬 의원을 떠올렸을까?

‘사랑과 꿈이 없는 정치라는 게 과연 가능한가. 그런데 오늘날 정치는 이 자신의 동의어를 배반하고 망각해버렸다.’ 우리 정치의 ‘에피파니’를 꿈꾼 철학자의 소망을 안타깝게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