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마지막 숲길 산책이겠다. 황금빛 햇살이 쏟아지기는커녕 잔뜩 흐린 날씨에 매서운 바람만 몰아친다. 하지만 걸을 수 있어서 좋다. 바쁜 일상에서 잠시 빠져나와 이따금 호숫가 숲길을 걸어보는 이런 시간이 없었다면 나는 숨이 막혀 정신을 잃었을 것이다.

이렇게 오래 갈 줄 몰랐다. 2021년도 코로나19와 함께 시작했다. 예기치 못한 일들이 끊임없었던 한해였다. 개인적으로는 손쓸 수 없이 무너진 마음을 끌고 한해의 끝에 닿아간다. 봄날엔 부친을 여의고 깊은 슬픔과 무기력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상태여서 글을 쓰지 못했다. 시든 산문이든 쓸 수 없는 상태가 계속되었다. 기억력이 흐려졌고 상상력은 극도로 빈곤했으며 자신감마저 사라졌다. 아무도 짓밟지 않았는데 나의 자존감은 바닥을 기었다. 어제 새벽에는 세면대에 머리를 처박고 짙은 피를 토하는 선연한 꿈에서 깨어나 아무래도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신병원에 가고 싶으면 글을 쓰지 말고 정신병원에 가야 한다”고 이제재 시인은 ‘월드’라는 시에 썼다. 그 젊은 시인의 문장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시인은 시라는 침묵을 뱉을 때 스스로를 응시하며 관찰하고 치유할 수 있다.

나는 올해 시인도 작가도 아니었던 것 같다. 그것은 직업은 아니며 상태이거나 태도인 것이다. 시 쓰는 상태를 유지하는 날이 드물었고 작가의 태도로 삶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끊임없이 관찰하지도 못했다. 자학과 자책을 밥 먹듯 하며 다른 업무에 온정신을 팔았다.

내가 만난 작가들은 달랐다. 삶의 우선순위가 창작이었고 거기에 자신들의 영혼을 담은 사람들이었다. 올해 내가 기획하고 진행한 예술행사는 29회였고 초대작가로는 나태주 이산하 김사인 은희경 하재일 손세실리아 김경윤 정다연 강혜빈 문보영 김연덕 이제재 이재훈 기혁 류성훈 임지영 이병철 등 마흔한 분이었다. 2월부터 책방이듬에서 이루어진 낭독회와 북콘서트, 백마화사랑에서 9회째 열린 ‘문화산책하는 날’ 프로젝트까지. 글을 쓰는 작가뿐만 아니라 싱어송라이터 정민아와 이상진의 실황공연, 영화감독인 조민호의 영화상영과 특강 등도 있었다.

그 모든 작가들은 내게 충격과 비탄을 함께 주었다. 공통적으로 준 충격은 폭력에 대처하는 자세이다. 작가와 작가가 아닌 사람의 차이이기도 한 것 같다. 누구든 살면서 어떤 형태로든 폭력을 경험하게 되는데, 작가란 이들은 그 아픔과 분노, 서글픔을 거름으로 삭여 미학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자신의 온몸에 새겨졌을 폭력적 상황을 낯설고 신비한 방식으로 전환하거나 끔찍할 정도의 리얼리즘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아직 멀었다. 지겹도록 오래 내 상처만 파먹으며 갈 길의 방향도 잡지 못한 채 머뭇거렸다. 책방 운영한답시고 월세를 벌어야 하는 소상공인의 중압감에 위축됐다. 사람들을 예술의 세계로 초대한다는 명분으로 스스로는 창작에서 동떨어진 채 선생으로 기획자 겸 진행자로 흘러갔다.

올해 마지막 낭독회를 12월 16일에 열었다. 이번에도 비대면 온라인으로 진행하며 안타까웠다. ‘작은 것들에 깃든 시’라는 타이틀로 열 명의 시인들이 무대에서 자작시를 낭독했는데, 문학적으로 성공했다고 일컬어지는 시인들도 있었고 아직 시집 한 권 내지 않은 시인들도 있었다.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공통점은 다만 작고 평범한 순간, 하찮다고 할 대수롭지 않은 일상 속에서 행복을 발견하며 매일 한 줄의 시라도 적어가는 사람들이라는 것. 그들이야말로 시인이 아닐까. 조심스러운 낭독으로 전해지는 감정의 아름다움에 새삼 놀랐다. 불현듯 기쁨과 보람이 섬세하게 파고들었다. 비록 나는 시를 읽지 않았지만, 시가 소통되게끔 문을 잡아주는 역할을 했으니까.

내년이라고 바이러스가 종식될 것 같지는 않다. 이 시절 사람들이 시를 쓰면 좋겠다. 외롭고 허무하고 캄캄하게 패배감에 사로잡힐 때 글쓰기보다 좋은 벗은 없다. 자아가 부서져서 사라질 듯 작아진 자리에 시가 깃들 것이다. 다시 나도 쓸 수 있을 것 같다.

시인·책방이듬 대표·한양여대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