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관리시설을 마련하기 전까지 사용후핵연료를 원전 부지 내에 저장한다’는 내용의 제2차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 기본계획안을 입안했다. 이 안이 확정되면 부산 울산 울진 영광 등 원전 소재지역이 사용후핵연료 폐기장으로 고착될 우려가 크다. 중간저장, 영구처리 등 사용후핵연료 관리시설은 모두 원전 이외 지역에 설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하나, 30년 넘도록 관리시설 설치장소를 확정하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는 현실이 그 관측을 뒷받침한다.

사용후핵연료 폐기장 선정은 국내 최대 갈등사안이다. 1989년 경북 영덕·영일·울진을 시발로 충남 안면도, 강원도 고성·양양, 경남 양산, 경기도 굴업도 등 많은 지역이 후보지로 거론됐지만 모두 주민의 거센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사용후핵연료는 치명적 유독성이 사라지는데 10만 년이란 천문학적 시간이 걸리는 인류사 최악의 골칫거리여서다. 이런 물질을 공론화 작업도 거치지 않고 원전 내 임시저장시설에 최장 37년간 보관하겠다니 해당 지역민이 반발할 수밖에 없다. 37년은 ‘영구’나 마찬가지다. 2016년 박근혜 정부 때 1차 계획을 수립하면서 원전 내 보관기간을 36년으로 설정했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한 데서 그 가능성을 본다. 이런 상태에서 37년간 원전 소재지에 사용후핵연료를 보관하면, 핵폐기장으로 기정사실화되는 결과가 발생할 공산이 크다. 정부의 의도는 여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더불어민주당과 사전 당정협의를 거친 것으로 드러나 더욱 의심이 간다. 탈핵울산시민행동은 “(지난 9월 15일) 고준위 특별법을 대표발의한 민주당 김성환 의원이 시민단체 등에 공개한 관련 자료를 보면 ‘산업부와 협의를 마쳤다’는 내용이 있다”며 당정의 담합 의혹을 제기했다. 원전 소재지 주민이 영원히 방사능 피폭 위험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정책을 국민 공론화는커녕 해당 지역민의 의견조차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추진하니 독재정권 시절의 횡포를 연상케 한다.

정부의 2차 계획안은 원전 내 사용후핵연료 임시저장시설 포화시점과도 맞지 않다. 한국방사성폐기물학회에 따르면 고리·한빛(2031년), 한울(2032년), 신월성(2044년) 등 국내 다수 원전의 사용후핵연료 임시저장시설이 37년의 보관기간 경과 전에 포화상태에 이른다. 정부는 이런 포화시점을 2차 계획안에 담았다. 당장 공론화 작업을 벌여 사용후핵연료 관리시설 설치장소를 논의해야 할 상황에 이 문제를 두고 37년간 장고하겠다니 황당하기 이를 데 없다. 불을 보듯 명확한 모순된 내용을 한 계획안에 실었으니, 정부 스스로 계획의 허구성을 시인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정은 2차 계획 수립과 특별법 제정을 중단해야 한다. 지역민과 시민사회의 공론부터 먼저 묻는 게 순리다. 그렇게 도출한 공론을 바탕으로 2차 계획과 특별법을 마련하는 게 민주적 절차다. 당정의 무리한 시도가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