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가 막 끝난 교실로 누군가 찾아왔다. 모르는 얼굴이다. 나는 프로젝터를 끄고 스크린을 올리고 노트북을 접고 가방을 챙기고 안경을 벗고 책상을 정리하는 중이다. 콩나물국밥을 먹으러 갈 참이다. 이 강의실의 사람들과 함께 시와 소설을 읽고 나서 먹는 콩나물국밥은 각별하다. 어떤 음식은 사람의 기억에 새겨진다. 미각과 후각이 깨운 내장기관의 감각이 뇌에 이미지를 깊게 각인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학기 내내 나는 줄기차게 콩나물국밥만 주문한다. 강의를 마무리하는 소박한 의례라고 할까. 내가 더는 이 강의실에 오지 않아도, 콩나물국밥을 보면 그들은 나를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이 방과후 식사의례를 놓칠 것 같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나의 처음 질문은 조금 의례적이다. 세 시간 연강 후이니 당 보충이 시급하다. 여기가 시를 공부하는 곳인지요. 손님이 급하게 묻는다. 정신이 번쩍 든다. 손님에게 건너편 의자를 권한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는다. 손님이 선 채로 푸념을 쏟아낸다. 손님은 마음이 많이 바쁜 것 같다. 빠르게 질문을 던진다. 질문의 내용은 간단하다. 다음 학기 등록방법과 등록일자이다. 그러나 아직은 담당주무관만 알 수 있는 정보다. 내가 당장 대답해줄 수 없는 정보는 알아봐 드리기로 하고 전화번호를 교환한다. 손님이 바라는 것은 간단하다. 시를 공부하고 싶다. 손님의 나이는 우리 나이로 81세. 왜 그렇게 바빠 보이는지 조금 알 것 같다.

“너는 시나 소설을 쓰거라.” 한국전쟁 중에 부산 감천에 한 초등학생 소녀가 살았다. 어느 날 소녀의 학급이 송도와 대티고개를 다녀왔다. 오십 명 중 네 명이 기행문을 썼다. 글을 읽으신 선생님은 소녀에게 말씀하셨다. 직장을 다니는 동안에도 그 말씀 떠나지 않았다. 세월은 빨리 흘렀다. 시니어가 된 소녀는 나무와 꽃과 대화하며 혼자 내면의 시인을 키웠다. 사느라 바빴다. 시를 쓸 짬을 내지 못했다. 몇 년 전 집수리 하느라 허리를 두 번 다쳐 일을 쉬는 사이 시를 공부할 곳을 알아보았다. 문화원에서 잠시 시를 공부했다. 그 나이에 무슨 시냐고 친구들이 흉을 보지만 여생 동안 하고 싶은 것이 시뿐이다.

빠르게 쏟아내는 사연에서 간절함이 느껴진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전쟁의 폐허 속에 들은 한 문장이 내 앞의 손님의 심장에 박혀있다.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이 되는 말, 삶을 이끌어가는 내비게이션이 되는 말이 있다. 어떤 말은 평생 가슴에 남아 북극성이 된다. 어떤 말은 평생 삶을 지탱하는 등뼈가 된다. 어떤 말은 평생 자존감의 중심이 된다. 그 한 문장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행운인가. 한 마디 희망의 말 긍정의 말이 기댈 유일한 언덕일 때가 있다. 반대로 어떤 말은 모멸감이 되거나 반복해서 고통을 주는 트라우마가 된다. “자라나는 새싹”의 마음의 머리를 문질러버리는 무심한 말이 가슴에 박히는 잔혹한 교실도 있다. 감수성이 충만한 어린 시절에 들은 어떤 말은 평생 각인된다. 그 말이 미래를 예단하는 말일 때는 특히 더 그렇다. 어린 시절은 평생 등대가 되는 말, 별이 되는 말을 모든 아이에게 선물하는 학교여야 할 것이다.

여기 말의 선물을 오래 간직한 손님이 서 있다. 한 갑자 훨씬 이전 선생님의 한 문장은 어두울 때마다 빛이 되었을 것이다. 무언가 성급하게 보이는 것은 시간의 빠름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늦지 않았으니 안심하시라. 늦게 한글을 해독해서 시를 쓰는 시니어들도 계시다. 이웃나라에는 구십세에 시작해서 백세에 시집을 출간한 분도 계셨다. 말씀드린다. 선생님, 콩나물국밥 다 식어요. 전화가 온다. 평생 가슴에 시인의 꿈을 가지고 살아온 손님의 뒷모습이 눈부시다. 빛이 되는 말씀을 간직한 사람의 후광이다. 헤르타 뮐러 소설 ‘숨그네’가 오늘 식사의례의 디저트다. “나무복도에서 할머니가 말했다. 너는 돌아올 거야. 그 말을 작정하고 마음에 새긴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수용소로 가져갔다. 그러나 그런 말은 자생력이 있다. 그 말은 내 안에서 내가 가져간 책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큰 힘을 발휘했다. 돌아왔으므로 나는 말할 수 있다. 어떤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