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밥 한 끼 대접한다는 약속을 못 지켰습니다.” 문학상 시상식에 가는 길이었다. 옆자리에 앉은 선배 시인에게 걸려온 전화 목소리가 다정하다. “갑자기 서울로 발령이 나서 가는 중입니다. 자리 잡으면 내려와서 맛있는 밥 한 끼 꼭 대접하겠습니다.” “그래, 고맙네. 서울 가서도 끼니 잘 챙기고 건강하게나.” 코로나로 마음 놓고 식당에 마주 앉을 수 없는 상황에서 밥 한 끼 대접 못 한 제자의 안타까움과 가족을 두고 멀리 가는 그 제자의 끼니를 걱정하는 스승의 따스함이 고스란히 내게도 전해졌다.

“이어폰 귀에 꽂고 눈길 피하는 동창생/밥 먹었니 물으려다 못 본 척 지나쳤지/사업이 무너졌다고/귀띔하는 바람결//입시를 망쳤던 날 아버지가 사주신 밥/속상한 맘 감춘 채로 눈물도 먹어버린/대낮의 저 창백한 달/든든해진 그날 뱃속//쫓아가나 쫓겨가나 모든 게 잠시더라/‘언제 밥 한번 먹자’ 다음도 기약 못 한/새벽녘 안친 밥 냄새/오늘을 일으킨다” (우아지의 시조 ‘밥심’)

우리는 “아침 드셨습니까?” “식사하셨습니까?” “밥은 먹고 다니니?”라는 인사를 종종 나눈다. ‘밥’의 안부가 궁금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안위를 염려하는 우리만의 인사법이다. 거기에는 인정이 있고 사람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다. ‘먹방’과 ‘쿡방’이 유행하여 음식문화가 생존의 차원을 넘어 문화의 차원에 이른 요즘, 그 중심에 있는 ‘밥’은 우리에게 여전히 삶의 근원이고 힘이다. ‘집밥’ ‘밥심’ ‘밥벌이’ ‘밥값’ ‘찬밥’ ‘밥맛’ ‘콩밥’ ‘밑밥’이라는 낱말이 때로는 그리움과 응원으로, 때로는 협박으로, 때로는 부정적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그 속에 있는 ‘밥’은 우리의 생활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세종대왕께서는 1419년 연이은 흉년으로 굶어 죽는 백성이 없도록 잘 살피라는 교지를 내리며 “民惟邦本 食爲民天”(민유방본 식위민천·세종실록)이라고 했다. 식(食)으로 통칭하는 밥은 곧 백성의 하늘이었다. 아니, 지금도 밥은 우리의 하늘인지도 모른다. 밥을 함께 먹는 사람을 ‘식구’라 하는 것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금 뉴욕에 사는 친구는 결혼한 지 30여 년 동안 신랑에게 식은 밥은 단 한 끼도 먹인 적이 없다고 한다. 청혼하면서 신랑이 한 부탁 때문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함께 산 친구의 신랑은 어머니가 새벽에 일을 하러 가시면서 전기밥솥에 밥을 해 두면 형이랑 누나랑 하루 종일, 때로는 며칠 동안 그 밥을 먹었다고 한다. 그에게 오랫동안 보온이 된 밥은 어머니의 부재를 상징했으며 늘 갓 지은 밥이 그리운 유년을 보냈다고 한다. 그에게 밥은 그리운 어머니의 손길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미국 생활을 견디게 해주는 또 다른 그리움이며 힘인 것이다. 친구는 갓 지은 밥으로 그의 외로움과 그리움을 채워주고 있다.

따뜻한 밥 한 끼는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왕후의 밥, 걸인의 찬”(김소운의 '가난한 날의 행복')으로 실직한 남편은 아내를 감동하게 했으며 1인분만 시키는 세 모자에게 늘 티 나지 않게 우동 반 덩어리를 더 넣어주던 북해정의 주인(구리 료헤이의 ‘우동 한그릇’)은 그들에게 힘이 되었다. 통장 잔액이 571원이었던 아버지의 부탁으로 딸 생일날 피자를 선물한 피자가게 사장님은 온 국민을 감동케 했다. 밥이 우리를 감동하게 하는 것은 단순히 먹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인정과 어려움을 견딜 힘이 있기 때문이다.

밥 한 끼 대접 못 하고 서울로 간다는 시인의 제자는 중학교 시절 어려운 시기를 잘 견딜 수 있게 해 준 스승에게 종종 맛있는 밥을 대접했는데 코로나로 그 기회가 줄어든 것을 늘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그에게 있어 밥 한 끼 하자는 말은 스승에 대한 고마움의 다른 표현이며 안부를 확인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그날 시상식 후 나눈 밥은 유난히 따듯하고 맛있었다. 밥으로 이어진 스승과 제자의 훈훈한 모습이 내 밥그릇에도 그득했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들과 나누는 밥 한 끼는 인연이고 만남이고 정이고 안부이다. 오늘은 보고 싶은 이들에게 전화를 한다. “그리운 이여,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밥 한번 먹읍시다.”

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