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을 떠안을 때에야 자유로울 수 있다. 책임은 돈과 노력과 정성을 요구하기에 책임에서 도망가고 싶고, 책임 자체를 부정하고 싶다. 그러나 책임을 회피하는 것에는 부끄러움과 수치심이 있다. 눈치 보기와 핑계가 있고, 굴욕과 구속, 껄끄러움, 초라함도 있다. 때로는 구차해 보이고 비루해 보인다. 책임에서 도망가는 삶에는 자유가 없다. 책임을 감당하는 것은 그 부자유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책임을 감당하는 것 속에 자유가 있다.
사회에 대한 책임은 강요되지 않은 책임이다. 누구의 책임도 아니기에 누구도 떠안으려 하지 않는 책임이다. 그러기에 사회에 대한 책임은 그 책임을 인식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은 일이다. 사회에 대한 책임을 떠안는 것은 귀하고도 소중하다.
인문학은 ‘잘 사는 것’에 대한 고민과 공부다. 인문학은 문학 역사 철학에서 감동과 생활양식으로서의 문화, 경제와 과학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이러한 확장이 없는 인문학은 공중에 뜬 것이 되고, 실천력이 떨어지며 진부하고 촌스럽다. 인문학은 문제를 해결하며 삶에 힘과 생기를 주고, 잘 사는 데 도움을 주는 실용이어야 한다.
여차저차 하여 ‘인문무크지 아크’를 손에 넣었다. 인문 즉 잘 사는 것에 대한 글을, 1년에 두 번 출간하는 반연간지로 2020년 12월 15일에 1호가 나왔다. 표지는 하얀 바탕과 몇 개의 선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그 단순함이 근사하다. 설렘을 준다. 1호의 주제는 ‘휴먼’으로 23편의 글이 실려 있다. 문화와 역사 철학 미술 경제 건축 등 다양한 분야의 글들이 휴먼을 향해 달려간다. 1호에는 압도적인 한 문장이 있다. “인간 중심이 아니라 인간적인 내용을 담았습니다.” -고영란
“인간 중심이 아니라 인간적인!” 시대의 급소에 해당하는 문장이다. 기후 위기의 현실화로 ‘인간 중심’의 시대는 과거가 된 데다 인간적인 것에 대한 공백과 결핍, 갈구와 갈망은 큰 시대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확장성이 크다. 인간 중심이 아니라 인간적인 삶·사회·경제·문화·사상 등등.
인문무크지 아크 2호 ‘믿음’은 353쪽으로 1호(321쪽)보다 조금 두꺼워졌다. 2021년 6월 28일 출간되었다. 22편의 글이 실렸다. 1호의 중심 글이 ‘인간중심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이었다면 2호의 중심 글은 ‘우리는 어떤 테두리 안에서 살고 있는가?’다. 기대와 이익의 테두리 안에서 맴돌고 있다는 자책이 훅 들어와 헤집는다. 2호에는 통찰력이, 좋은 문장으로 구현된 명문들이 곳곳에 들어앉아 있다.
“살아감은 ‘사라가는’ 일이다. ··· 살아감은 사라감이고, 사라감은 또한 살라감이다. 무엇을 ‘사르는가?’ 물론 ‘나’를 사른다. ··· 신앙의 대상이 무엇이든, 신앙의 실천이 무엇이든, 사람들이 찾고자 하는 게 제각기 다르면서도 끝내 하나로 귀결되는 것이 바로 자신과 남들을 위한 ‘돌봄’일 것이다. 돌보는 일이야말로 살리는 일이요, 살리는 일이야말로 사르는 일이다.” -정훈, ‘우리가 그것을?’ 살아감과 살리는 일은, 사르는 일이고 사라지는 일이라고 한다. 서늘하게 꽂힌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이야기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그는 ··· 그러나 봉팔 씨, 버스점을 치며 야성을 충전하고 변하려고 몸부림치던 그 시절이 조금 그립다. 인간이 믿고 싶어 하고 알고 싶어 하는 존재인 한, 점은 우리 곁을 안 떠날 것이다.” -조봉권, ‘‘버스점’을 치면서 이순신 장군을 생각했다’
‘지나치게’라는 부사 하나로 글 전체에 웃음기를 넣었다. 또 ‘떠나지 않을 것이다’가 아니라 ‘안 떠날 것이다’로 표현했다. 맛있다.
“프리츠커상을 받았던 건축가들은 다름 아닌 공간과 인간의 삶, 사회에 대한 ‘인상’을 새로 만들어 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해 새로운 ‘관념’을 부여한 것이다. 건축의 관념이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것에서, 보이지 않는 ‘인간의 삶’으로 전환되기 시작한 것이다.” -차윤석, ‘프리츠커상, 누가 받나요?’
‘인문무크지 아크’는 우리 시대의 가치를 이야기하고 있다. 가치는 삶을 이끌고 가는 것 혹은 삶의 중심에 놓는 것으로 뿌리가 흙을 잡아주듯 흩어지는 것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형식 그 자체가 이미 독보적인 가능성이다. 세계적인 도시에는 그에 걸맞은 잡지가 있다. 부산에는 ‘인문무크지 아크’가 있다.
도서출판 함향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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