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적어도 한 번쯤은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눈앞에서 내가 타야 하는 버스가, 지하철이 문을 닫고 유유히 떠나가 버리는 경험 말이다. (신호등이나 승강기도 비슷한 경험을 선사하지만 여기서는 논외로 한다.) 이럴 때는 대개 부아가 치민다. 대중교통은 나를 기다려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기다리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잡으려 노력해도 평상심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버스는 아슬아슬하게 도망치는 것이 특기다. 필사적으로 달려가느라 숨을 헐떡거리는 코앞에서 문을 닫고 매정하게 내달린다. 지하철은 내빼면서 친절하게도 무리하게 승차를 시도하지 말고 다음 올 열차를 기다리라고 조언한다. 문제는 그 열차가 10분 뒤에 온다는 것이다. 외국인들이 한국 하면 떠올린다는 “빨리 빨리”가 유전자에서부터 각인된 한국인이라면 그 10분은 영원과 같은 시간이다.
나이가 들수록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는 것이 힘에 부친다. 젊은 시절에는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대개 책을 읽었다. 앉아서도 읽고, 서서도 읽고, 기다리면서도 읽었다. 책을 읽다 내려야 할 역을 지나친 적도 몇 번 있었다. 책을 읽다 보면 지루하지도 않았고 서서 가도 별로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허리가 안 좋아지면서 앉아서 가는 것이 지상과제가 되었다. 그리고 운 좋게 앉으면 일단 졸고 본다.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야 서울로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수도권 외곽도시에 살면서 강의와 강연, 그리고 종종 있는 학회나 모임 혹은 다른 업무를 위해 일주일에 서너 차례 서울을 가야 하는 나로서는 단계적 일상회복 단계인 위드 코로나 이후 외출이 부쩍 늘어났다. 그리고 외출이 늘어나면서 비대면 시대에 잠시 잊고 있었던 대중교통의 불편을 다시 실감하게 되었다.
대중교통이 불편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누구 한 사람 - 예를 들어, 전동차를 조종하는 기관사나 버스를 운전하는 기사 - 의 탓은 당연히 아니다. 그 배후에는 개인, 시스템, 그리고 사회와 관련된 수많은 문제가 서로 얽혀있다. 자본주의 체제하의 다른 모든 문제들이 그렇듯이 가장 중요한 요인은 비용, 즉 돈이다. 시스템의 무언가가 완벽하지 않다면 그것은 십중팔구 충분한 비용이 사용되지 않은 탓이다. 지하철역이나 버스 정류장에는 이들 시스템에 보다 많은 예산이 배정되고, 적자가 해소되고, 인원이 확충될 필요가 있다는 취지의 포스터가 붙어 있는 것을 종종 본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내가 알고 있는 예산 낭비 사례 몇 개만 해결되어도 이 중 몇 개는 금방 해결될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나뿐만 아니라 대중교통의 문제점을 실감했던 사람은 누구든 한 번쯤은 해보았을 생각일 것이다.
밤늦게 혹은 비나 눈이 오는 날, 그리고 견딜 수 없을 만큼 덥거나 추운 날 정류장이나 플랫폼에서 참을성 있게 대중교통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의 모습은 한편으로는 숭고해 보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학습화된 무기력을 체현한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다. 나도 그런 사람들 틈에서 조용히 버스나 지하철을 기다린다. ‘대중교통이니까 어쩔 수 없다’는 여느 때와 같은 생각이 들다가도 상념은 운 좋게도 이런 운명을 피해간 사람들에게 향한다. 공식적으로는 대중들을 위해 일한다는 파워 엘리트들에게 대중교통은 3~4년에 한 번 시장에서 먹는 음식들만큼 생경한 것일 테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탈것은 언제나 자신들의 동선 앞에서 자신들이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좌석은 넓고 쾌적하다. 일반 운전자들처럼 본인이 그것을 직접 조작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탈것을 타고 내리는 행위에 ‘의전’(儀典) 이라는 것이 덤으로 따라붙기도 한다. 모든 것이 편리하고 쾌적하며 또 영광스럽다. 소위 구름 위의 삶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
그런 파워 엘리트를 뽑는 선거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후보들도 정해졌다. 우리나라가 강소국으로 진입하는 중요한 시기이니만큼 후보들은 나름의 장기적인 국정비전과 거창한 정책들을 준비하고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근본으로 돌아가 고대 이집트인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여겼던 관리, 즉 ‘배고픈 사람에게는 빵과 맥주를, 헐벗은 사람에게는 옷을 주고 배[舟]가 없는 사람들을 강 저편으로 건네주는, 고아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남편이 없는 여인에게는 형제와 같은’ 그런 리더가 선출되기를 바란다.
나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그들의 삶이 부럽지도 않다. 지하철이나 버스가 나를 기다려주는 불가능한 세상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매정하게 내 눈앞에서 떠나 버리더라도 조금 덜 기다리고 조금 더 편하게 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우리를 조금 덜 악착같게 만들어줄 리더를 희망해본다.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강의교수·이집트학 박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