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대학에서 새내기를 대상으로 ‘글쓰기 역량평가’를 시행했다. 대학 홈페이지에 제시문과 에세이 과제가 공지되었는데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어른’은 어떤 사람인지 정의하고, 자신의 경험한 어른 중에 이 이상적인 어른에 들어맞는, 내게 세상에 대한 좋은 인상이 만들어지는 순간을 선물한 ‘어른(부모님 제외)’과의 일을 서술”하는 것이 문제였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사람이 대부분일, 이십 대 초반의 학생들은 어떤 어른과의 일을 떠올릴까?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누군가는 이들에게 ‘세상에 대한 좋은 인상’을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돌봄이 한 사람의 세계를 살리니까.

행사나 인터뷰에서 작가로서 듣는 질문 중에는 ‘생활’을 묻는 사람이 꽤 있다. 글 쓸 때 주로 무얼 먹고 마시는지, 원고료는 얼마를 받는지, 작업실은 있는지, 글 쓰지 않는 시간에는 무엇을 하는지, 징크스는 무엇인지 등을 묻는다. 작가에 대한 환상을 반영한 질문 중에 ‘소설 완성을 위해 어떤 광기(?)까지 부려봤는지, 글 쓸 때 며칠이나 밤을 새웠는지’ 도 있다. 그러면 나는 차분히 대답한다. “광기를 부릴만한 배짱보다 글이 완성되길 바라는 소망이 있고, 밤샘 글쓰기는 하루 이틀 정도 해봤는데 그것도 이십 대에나 가능했습니다.” 엄청난 대답을 기대한 객석의 분위기는 금세 가라앉는다. “쇠도 씹어먹을 나이일 때는 약 이십오일하고도 열세 시간 자지 않은 적이 있는데, 그때 제 혈중 카페인 농도가 치사량에 가까웠을 겁니다.” 그런 농담이라도 던졌어야 했나 싶다.

글 쓰는 일도 엄청난 체력이 필요하다. 소설은 하루 이틀 만에 완성되지 않아서 몸을 혹사할 수 없다. 많은 작가가 규칙적인 생활과 건강한 식습관, 철저한 운동으로 몸을 관리한다. 꽤 단조로운 삶이다. 물론 글 쓰는 내 생활이 건강하단 말은 아니다. 지금 이렇게 고생하니 말이다.

요즘 내가 지닌 생활 습관을 관찰한다. 기상 후, 출근 후, 저녁 식사 후, 지켜야 할 습관을 실행한다. 스마트폰 앱으로 운동과 수면의 질을 확인한다. 남편 곰용 씨가 챙겨주는 아침과 토마토 주스를 먹는다. 몇 년 전부터 대상포진을 시작으로 안면마비, 특발성 두드러기를 거쳐 요즘은 지루성 피부염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부터 시작한 가려움이 눈과 귓구멍으로 퍼졌다. 약을 먹고 나아졌지만, 가끔 얼굴이 따갑고 가렵다.

원인을 찾아봤는데 이삼십대에 엉망진창으로 지낸 생활이 몸에 독으로 쌓였다가 한꺼번에 터졌다는 추측이 가장 타당했다. 그 시절의 나를 찾아가 혼 좀 내고 싶다. 하루 한 끼 먹는데 나쁜 음식과 술로 채우고, 봉지 커피를 시간마다 마시고, 운동은 전혀 하지 않고, 규칙적인 수면 패턴을 만들지 않아 불면증에 시달리던 그 시절. 왜 나는 나를 돌보지 않았나. 어른이라면 갖추어야 할 ‘책임과 돌봄’에 무지했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독립한다고 다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주변을 돌볼 줄 알아야 한다. 특히 자신. 어른이 책임감을 느끼고 돌봐야 할 대상에 자기 자신도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었다.

여름 동안 어느 청년의 에세이 첨삭을 거들었다. 그가 준 다섯 편의 글은 ‘어른이지만 아직 어른이 아닙니다’라는 주제로 묶였다. 십 대 시절의 방황과 뒤늦게 들어간 대학에서의 치열한 생활, 취미를 즐기는 방법, 아끼는 이들과 함께 잘 살기 위해 건네는 말을 통해 자신과 주변을 돌볼 줄 아는 어른의 삶을 사유한 글이다. 분명 내가 멘토 역할을 맡았는데 오히려 내가 배우는 시간이었다. 글을 읽으면서 새삼 그가 어른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동시에 ‘나는 어른인가’를 되물었다. 답은 부끄럽게도 ‘아니다’ 였다.

결혼 전에는 엄마의 돌봄에 기댔고 결혼 후에는 남편의 돌봄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그러니 부끄럽게도 어른이 아니다. 올해 말까지는 어떻게든 몸을 잘 추슬러서 남편과 엄마와 고양이를 잘 돌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게 돌보다가 힘이 생기면 모르는 이도 잘 돕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 모두의 세계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겠지.

다시 어른! 어른임을 자각하되 어른 행세하지 않고 나와 너를 돌보는 사람 되기. 그것을 올해 남은 목표로 달력에 적어 두었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