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극작가, 비평가이던 가브리엘 마르셀(1889∼1973)이 인간을 이렇게 정의했다. 비아토르는 ‘걷는 자’, ‘나그네’라는 뜻. 호모 비아토르는 ‘여행하는 인간’이다. 인간은 삶의 의미를 찾아 떠나는 존재라는 것이다. 여행하는 인간은 항상 길 위에 있다. 호모 비아토르의 ‘여행’은 곧 ‘길(道)’이다. 길은 사색의 공간이자 선(線)이다. 끊임없이 그 길을 가려면 부지런히 숨을 쉬어야 한다.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같은 이름의 책(김영길 씀, 사람과사람 펴냄, 2004)도 나왔다. 건강 관련 책자인데도 스테디셀러다.
서양이나 동양이나 길을 사유하는 방식은 별반 다르지 않다. 이를 알아보려고 ‘길 위의 인문학’(구효서 외 씀, 경향미디어 펴냄, 2011)을 펼쳤다. 책의 에필로그(길 위의 인문학, 그 융합의 무지개를 위해)에서 답이 보인다. “무엇보다도 길을 먼저 말하는 경전 가운데 으뜸”인 노자의 ‘도덕경’을 떠올리는 장면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자연에 순응하는 무위(無爲)의 삶을 강조했다. 길에 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길을 길이라 말하면 늘 그러한, 꼭 같은 길이 아니요(道可道, 非常道) / 이름을 이름이라 하면 늘 그러한, 꼭 같은 이름이 아니로다(名可名, 非常名) / 이름이 없는 것, 그것은 하늘과 땅이 처음 열리는 상황이요(無名, 天地之始) / 이름이 있는 것, 그것은 모든 것의 바탕이라네(有名, 萬物之母)’.
대체 무슨 말인가. 해설이 따른다. “실존은, 살아 움직이는 인간 존재는, 항상 자기 동일성을 지니고 있는가? 저기 어제 내가 지나간 길이 있다. 그 길을 오늘 내가 지나왔다. 이 길은 같은 길인가? 내가 늘 바라보는, 저기 있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는 정말 항상 그 모습 그대로인가? 저기 푸른 소나무는 항상 그 소나무일런가?”라고…. 오늘의 강물은 어제의 강물이 아니듯, 오늘 걸은 길은 어제 걸었던 그 길이 아니다.
길에는 선인의 자취가 묻어나기도, 스토리텔링이 함께 녹아 있기도 하다. 이런 길은 곳곳에 있다. 동래읍성과 충렬사, 복천동고분군으로 가는 길이 그렇다. 초량왜관 길이 그렇고, 광복로와 용두산공원으로 가는 길이 그렇다. 회동수원지를 돌고 돌아 부곡동 십휴정 기찰(十休亭 譏察) 터로 가는 길이 그렇다. 기찰은 기찰 포교가 오가는 사람을 검문하는 한편 상인들의 물품을 조사하는 검문소. 동구 증산왜성으로 오르면서 숨을 헐떡이는 길 역시 그렇다.
사례 하나. 부산 사하구 다대동에서 임진왜란 당시 다대첨사 윤흥신(?∼1592) 형제를 만나는 길이다. 윤공단에서 몰운대로 가는 구간이다. 그런데 겉보기에는 딱딱한 아스팔트와 시멘트 포장 길만 보인다. 다대포진 성터라고 해봤자 부산유아교육진흥원 담장 모퉁이의 석축 일부만 찾아볼 수 있다. 성터라고 부르기도 부끄러울 정도다. 하지만 파란만장한 삶의 윤흥신 형제 이야기를 녹여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윤흥신의 아버지는 윤임(1487∼1545)이다. 연산군을 쫓아낸 중종반정의 공신으로, 권력의 중심이었다. 중종 때 장경왕후가 윤흥신의 고모. 그러나 을사사화로 윤흥신의 아버지와 형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윤흥신과 동생 흥제는 나이가 어려 목숨은 건졌으나, 관노로 30년 넘게 살았다. 선조 즉위 직후 아버지 윤임의 복권이 이뤄지면서 윤흥신은 무과별시에 이어 1582년(선조 15) 진천현감에 부임했는데, 문자 독해력이 떨어진다며 쫓겨났다. 이후 윤흥신은 당시 우의정이던 류성룡의 천거로 다대첨사로 부임한다. 임란 발발 불과 얼마 전이었다.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임란 순절자를 모신 충렬사에는 한동안 윤흥신의 위패가 없었다. 사적이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까닭이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동래부사 조엄(1719∼1777)이 윤흥신의 사적 조사에 앞장섰다. 조엄은 고구마를 우리나라에 처음 들여온 ‘조내기 고구마’의 주인공이다. 조엄은 경상도관찰사가 돼 동래를 떠난 뒤에도 윤흥신을 챙겼다. 결국, 윤흥신의 위패는 1772년(영조 48) 충렬사에 모셔졌다. 역사와 인물, 스토리텔링…. 윤흥신 형제의 이야기를 통해 ‘여행하는 인간’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되새긴다.
길은 그 자체로도 빛을 발한다. 굳이 스토리텔링을 엮어내지 않더라도…. 길을 걷는 동안 자연과 대화하는 재미 역시 쏠쏠하다. 경남 김해 장유누리길(13.5㎞)이 그중 하나다. 율하천 대청계곡 대청천 조만강을 연결한 길이다. 그 길에서 ‘보석’을 만날 수 있다고 장담한다. 맑은 물이 흐르는 하천을 낀 오솔길을 걷다 보면 속이 다 시원하다. 오는 13일 ‘장유누리길 2021 걷기 축제’가 열린다. 깊어가는 가을, 장유누리길에서 ‘보석’을 많이 캐 가길 권한다.
편집국 부국장·걷고싶은부산·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상임이사 inmin@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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