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1인출판사를 통해 펴낸 책 중 ‘하지만, 그렇다 해도, 말하자면 도저히(우연 지음, 글이출판, 2020)’라는 단편소설집은 타자의 변덕과 기분에 좌절하는 이웃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그 중 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중년의 남녀가 여행을 가던 날, 남자는 여자의 차를 몰며 모시조개를 찾기 위해 내비게이션으로 시장을 찾았지만 몇 시간이 지나도 그 시장은 찾지 못했다. 여자는 5년 넘게 내비게이션을 업데이트하지 않고도 불편함 없이 지내는 사람인데, 왠지 남자가 고생하는 모습이 가여워서 “미안해서 어쩌죠”라고 한다. 남자는 여자를 다독이며 괜찮다, 그럴 수도 있다고 말했는데, 여자는 어쩐지 진짜 자신이 잘못한 것처럼 느껴졌다는 대목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도 일상에서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의미로써 미안한 마음이 아니어도 종종 미안하다는 말을 한다. 이 말은 마치 업무상 주고받는 메일의 마지막을 “감사합니다”로 끝내는 것과 비슷하다. 일종의 습관이자 관계를 좋은 쪽으로 가져가기 위한 장치다.

그걸 보여주는 일례가 얼마 전에 있었다. 프로젝트 단위의 일을 제안 받아서 기본적인 협의를 거친 후 구체적인 업무 이야기를 담당자와 주고받고 있었다. 그러던 중 프로젝트 내용이 다소 변경된다는 통보를 받고 그에 따른 나의 조건을 제시했다. 그렇게 무리 없이 진행되겠다 싶었는데, 상대 측의 행정 절차상의 문제가 생겨 결국 성사되지 않았다.

별로 속상하진 않았다. 그쪽과 나 모두 각자의 원칙대로 선택한 것뿐이니까. 다음 날 담당자가 내게 메일을 보내 일이 이렇게 되어 죄송하다고 했다. 프로젝트 초반 대부분의 것들을 같이 고민하고 결정하느라 애썼는데, 자기 조직의 기준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면서. 그걸 담당자가 죄송해야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여전히 그 담당자를 좋은 인상으로 기억한다.

이렇듯 죄송하다는 말은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는 힘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고맙다는 말과 동등하다. 그리고 이런 표현을 잘하는 사람이 결국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닐까. 어쨌든 말한다는 건 상황과 맥락을 이해하는 노동이라 생각하니까.

한편 지난 추석 연휴 때는 썩 유쾌하지 않은 일을 목격했다. ‘N잡러’인지라 연휴라고 해도 썩 다른 점을 못 느꼈는데, 밥을 먹으려고 식당을 찾다가 연휴임을 실감했다. 몇 군데 허탕을 친 후에 들어간 식당은 가족 단위의 손님이 제법 많았다. 나의 일행이 앉고 나서 잠시 후 아이 셋을 포함해 3대를 아우르는 가족이 들어왔다. 코로나19 정부 방역지침에 따라 식당에서 5인 이상 식사가 제한되는 시국이다. 하지만 몇 명은 백신접종 완료자라고 해서 두 테이블로 나눠 앉아 주문을 받기로 했지만 끊임없는 불만으로 시끄러운 손님들이었다. 그들에게 백신접종 완료 확인증은 없었다. 식당 종업원은 공손하고 정중한 태도로 식사가 불가하다고 했고, 말하는 내내 정부 방역 지침이라 어쩔 수 없음을 죄송해 했다. 하지만 종업원에게 돌아온 건 입에 담기도 힘든 폭언과 욕설뿐이었다. 불쾌함이 온 식당을 메웠다.

진상은 대개 그러하듯 목소리만 크고, 논리나 도덕적인 언사는 일체 없는 사람이다. 나로서는 도저히 용납하기 힘든 상황을 목격하고 있자니 부끄러움은 늘 그것과는 상관없는 타인들의 몫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긴 일회성에 지나지 않는 타인들에게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진상이 아닐 테지. 말이 안 통하는 사람에게 죄송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던 종업원은 그 손님이 나간 이후에도 식당 안에 있는 모든 손님들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나는 마음이 착잡했다. 따지고 보면 종업원이 죄송해야 할 일도 아니다. 손님이 불만을 토로해야할 대상도 종업원이 아니다. 그저 눈앞에 있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분노의 대상이 되는 건 서비스를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겪는 일이라 들었다. 이것이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보지 못하는 데서 기인한다는 것도.

진심으로 한 말에 제대로 된 응답을 받지 않으면 소설 속 여자처럼 찜찜한 마음이 들기도, 식당 종업원처럼 잘못하지도 않은 일을 옴팡 뒤집어쓰고 말 것이다. 적어도 나부터 누군가의 진심어린 말을 선하게 받아들여야 하겠다고 다짐한다.

작가·‘일 인분의 삶’ 저자